블랙리스트와 맞바꾼 유럽행 티켓

[두살 배기 2.2]유럽 표류기1

by 라벤더핑크


당시 나는 소위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 중 미국과 캐나다, 북미는 모두 가보았으나, 유럽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직장을 다니며 최대 1~2주 긴 휴가 기간을 쓴다 하더라도 국가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돌아보기 힘들다. 뉴욕에 지내면서 느꼈지만, 좋은 곳은 단기 여행보다는 살면서 틈틈이 다녀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 눈 떠보니 나는 우연히도 외국계 기업 중에서도 유럽계 회사만 골라서 일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생활을 위한 내 철칙 중 하나는 지위가 안정된 상태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작정 여행자 신분으로 혹은 어학연수생으로 출국해서 석사학위로 전향하거나 취업비자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좀 더 안정 지향주의였다. 외국 생활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타지에서 멘붕이 오는 순간들은 어김없이 한 번쯤 찾아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최소한 시작은 안정적인 상태에서 출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환학생이나 정부 인턴쉽의 지위를 확보하고 나서야 비로소 외국으로 나갔고, 유럽에 나가는 것 또한 취업비자나 석사의 학생비자라는 지위를 확보한 후 해외로 나가겠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예전부터 마음에 품은 바는 MBA였기에 캐나다, 미국에 있을 때 가고 싶었던 학교의 MBA 설명회에도 틈틈이 참석하기도 했었다. 최소 5년의 업무 경력을 필요로 하기에 한국에 와서 적당한 경력을 쌓고 학비도 마련한 뒤 도전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경력을 쌓으면서 알아보니 요즈음은 워낙 MBA 소지자들이 많아 크게 드는 비용 대비 인정을 많이 못 받는다는 얘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경영학사를 위한 학위라기보다는 타 전공자를 위한 경영학위였던 지라 나는 과감하게 방향을 다시 틀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은 생활비 및 항공권을 모두 지원해주는 유럽으로의 석사 장학금 프로그램에 지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로 인문학과 혹은 이과계열의 장학 프로그램이 주였고, 학문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적 성향이 강한 경영학 전공을 위한 장학 프로그램은 전무하다 보아도 무방했다. 외국의 경우 학부 전공을 이수해야 석사 전공도 지원할 수 있어 전공의 벽을 넘어 내가 원하던 경쟁률 높은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란 거의 불가능이라 봐야 했다. 또한 대학교 지원이 가능한 Delf B2까지는 국내에서 취득이 가능했지만, 대학원 장학금 지원을 위한 C1의 경우 국내에서 공부해서 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어 습득이 대학교 강의를 듣기 위한 실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영어가 1년 걸렸다면 모든 물건에 성별을 나누고 주어만 해도 6개인 섬세한 언어 프랑스어는 2~3년은 걸린다고 보아야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영어와 달리 외국인 강사가 있는 수준 있는 교육기관을 찾는 것에도 한계가 많았다.


나는 우선 Plan B와 Plan D를 동시에 대비하기 위해, 퇴사 후 4개월 만에 불어 Delf B2 획득과 공인중개사 1차 도전(총점은 합격이나 민법 1문제 과락으로 아쉽게 낙방)이라는 비교적 양호한 성과를 냈다. 하지만 Delf B2를 따 보니 막상 석사 취득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는 불확실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Delf B2로도 석사 지원은 가능하지만, 장학금 프로그램에서는 경쟁력이 무척 낮을 것이다. 장학금 없이 일반 석사 과정에 지원한다면 B2로 지원의 확률이 좀 더 높일 수는 있겠지만, 어찌되었 건, 불어의 습득 속도가 영어에 비해서나 학생 때보다 나이가 더 든 상태에서는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석사과정을 따라가기가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미 시험을 위해 4개월을 써버렸기에 업무 공백기를 무한히 둘 수 없었고 무엇보다 통장잔고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기에 나는 현실적으로 일단 두 번째 plan C로 돌입하기로 결심했다. 국내 외국계 회사들에 다시 지원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plan B를 놓지 않기 위해, 국내 회사더라도 외국 지점 포지션에는 한번 지원해보기로 했다. 기존에 있던 회사가 name value가 좋았던 곳이었던지라 헤드헌터로부터 이렇게 좋은 회사들도 많구나란 생각을 가지게 할 만한 날고 기는 좋은 회사들의 러브콜도 많이 받았다. 여러 면접을 보던 중, 서울지역에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예전부터 일하고 싶었던 외국계 소비재 계열의 회사의 포지션 제안이 들어왔고, 면접 예정일자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다.


그러던 찰나, 소위 국내 최고 기업으로 꼽히는 회사의 동유럽 지점에 회계 포지션이 오픈되었다. 주저 없이 낸 이력서에 스카이프 면접이 열렸고, 1차 면접을 무난하게 보았던 것인지 곧 직원이 퇴사하여 공석이 될 자리에 일사천리로 현지 OJT 면접 일정이 잡혔다. 유럽지역 중에서도 내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꽃보다 할배'에 나온 크로아티아였다. 국내 최고기업은 직원도 아닌 예비 입사자 혹은 지원자에 불과한 나에 대한 대우부터 달랐다. 갑작스러운 면접 일정을 미안해하시며, 항공권, 숙식과 교통편 등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유럽에서 10일 정도의 OJT 면접을 제안해왔다. 항공권이 자비부담이었더라도 면접을 위해 달려갔을 텐데 항공권까지 지원해준다니!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Plan C에서 다시 Plan B로 돌아갔다.

크로아티아.png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첫 유럽행으로 머릿속은 온통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주황색 지붕으로 덮이며 들뜬 마음에 나는 그만 외국계 소비재 계열 회사 포지션 제안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필인지 (출국 전에 불참의 의사를 밝힌 통화라도 돼서) 다행인지 유럽 출국하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공항 철도 안에서 헤드헌터의 면접 확인 전화를 받았고, 나는 헤드헌터가 꼽은 최악의 면접자 1위인 갑자기 면접 펑크내기, 특히나 황당한 사유 중 순위권에 든다 꼽히는 해외 출국의 사유로 헤드헌터의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리며 미련 없이 유럽행의 출국길에 올랐다.


[두 살배기 2.0] 07 그곳은 군대였다.

[두 살배기 2.1] 08 나만의 Plan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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