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행의 에필로그

[두 살배기 2.4] 유럽 표류기 3

by 라벤더핑크

그렇게 나의 유럽 진출기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볼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뾰루지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때의 유럽에서 힘들었던 기억도 몇 년이 지나자 뾰루지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아침 바람결에 되살아난 지난밤 모닥불 불씨처럼 어느새 유럽에 대한 열망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금 피어났다.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퇴사 위기가 찾아왔을 때 쯔음, 때마침 운명처럼 그 위기를 참고 넘기게 해 준 두 차례의 유럽 출장행 기회가 찾아왔다. 본사에서 나라별 제각각인 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관련해서 담당자 교육 및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해 각 나라별 담당자들을 독일의 한 자리로 불렀던 것이다. 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 기업 내 생산, 물류, 재무, 회계, 영업과 구매, 재고 등 경영 활동 프로세스들을 통합적으로 연계해 관리하는 통합 시스템) 프로그램을 쓰는 회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시스템이 바뀌면 모든 부서의 시스템 작업이 회계장부로 통합되는 재무 부서에서는 멘붕이 올 수밖에 없다. 재무 부서의 시스템뿐 아니라 생산, 구매, 물류 등 각 부서로부터 넘어오는 데이터까지 모두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늬만 교육이고 실상은 어마어마한 업무 미션을 클리어해야 하는 부담감을 느낄만한 출장이라 사실 그다지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도 딱 하나, 그나마 내가 각종 핑계를 대며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군말 없이 이 어마 무시한 출장을 받아들인 것은 '유럽'이라는 출장지였다.


때는 마침 날씨도 가장 좋은 6월과 7월이었고, 독일이라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역 특성상, 앞이나 뒤로 일주일 정도 휴가를 붙인다면 몇 군데 나라도 돌아보는 것이 가능해지리라. 또한, 몇 안 되는 회사의 장점 중 하나로 매니저 승인이 있으면 직급에 상관없이 특정 시간 이상의 비행 시 비즈니스 석을 끊을 수 있어 난생처음 비즈니스 석도 타볼 기회도 한번 생겼다. 유럽 여행의 장점은 다양한 나라가 있어서 입맛대로 골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계획할 때가 제일 설렌다. 장바구니에 골라 담듯, 여행가 보고 싶은 나라를 하나씩 내 맘대로 담아본다. 그리고 완성된 여정에 맞춰 우선 비행기 좌석부터 예약해 놓는다.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왕복

7월 체코 프라하 In, 이태리 로마 Out


내가 배운 불어를 써먹을 수 있는, 불어를 배우면서 항상 가고 싶었던 나라 프랑스는 무조건 1순위였다. 6월에는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과 샤르트르, 스트라스부르를 돌고 독일 출장지로 향하여 업무 일정 후 남은 며칠의 여유기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가까운 도시 밤베르크와 로텐부르크를 여행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시내 관광지는 별로 크지 않아 출장기간 동안 회사분들과 같이 돌아보았다.

그림 같았던 꿈에서만 그리던 파리

7월은 좀 더 다이내믹하다. 체코 프라하에서 입국하여 독일 출장을 마친 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를 찍고, 피렌체와 프라다 아웃렛, 투어로 폼페이와 포지타노를 비롯한 남부 이태리를 돈 후 로마로 출국하는 일정이다. 스위스도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나라이긴 하나, activity 위주의 코스가 많아 혼자 가기에는 심심할 것 같단 이유로 일단 제외시켰다.


나의 이런 설렘 가득했던 플랜과는 다르게 현실의 나는 유럽지역 최대 취약자였다. 동유럽 때에는 짠 음식과 석회수 물갈이로 호되게 당했는데, 이번에는 시차와 무거운 짐이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어쨌든 유럽행의 본분은 출장이었기에, 노트북과 정장을 따로 들고 오다 보니 짐이 배로 늘었다. 또, 유럽의 약국은 내게 천국과도 같은 쇼핑 낙원이었다. 신기한 것과 선물 주기 좋은 물건들이 많아, 눈이 동그래진 채로 프랑스에서 이미 한차례 지르고 독일에서도 마구 담아오다 보니 캐리어가 천근만근이 되어버렸다.

여정 마지막이라 힘이 빠져 거의 돌아보지 못한 밤베르크의 성 미하엘 수도원, 프랑크푸르트 뢰머 광장, 동화 마을 같던 로텐부르크
로텐 부르크의 시가지 전경

숙박하는 호텔에서 교육도 동시 진행되었는데, 시차 때문에 3시만 돼도 졸리는 탓에 쉬는 시간 족족 방으로 올라와 눕게 되었다. 거기다 원래 시스템 바뀌는 작업이라는 게 모든 master data를 검토해보아야 했기에 보통 일이 아니었던 데다가 내게 몰린 업무 배정과 부족한 인력 덕에 담당자가 여러 명 나란히 앉아 simulation을 진행했던 다른 나라와 달리 나 혼자 모든 작업을 소화해내야 했다. 유럽의 일정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한국에서의 업무까지도 back up이 없어 내가 쳐내야 되어 가뜩이나 저질체력이 힘에 부쳤다.

그리하여 6월은 무거운 캐리어, 시차 적응, 빡빡한 업무 일정으로 지쳐버린 심신과 바닥난 체력으로 난 유럽 일정의 대부분을 호텔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버렸다. 특히 독일에서 업무 일정 중에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 미술관을 가고 싶어 한국에서부터 끊어온 값비싼 뮤지엄 패스는 체력 고갈로 그만 그냥 입장권을 샀으면 훨씬 저렴했을 베르사유 궁전 입장권으로 전락해버리고, 낮 뷰, 밤 뷰를 모두 보고자 유람선 바통 무슈와 바토 파리지앵을 모두 한국에서 미리 끊어왔다 한 티켓은 고스란히 날려버렸다...

화려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그럼에도, 업무가 없던 날의 파리, 스트라스부르, 로텐부르크 모두 너무 이뻤다. 꿈에 그리 리던 에펠탑은 사진보다 더 황홀했고, 유람선 바통 무슈와 택시 안에서 훑어 본 파리 전경은 잊히지가 않는다. 만화에 나오는 모습보다 더 화려했던 베르사유 궁전도 인상 깊었다. 빛의 축제를 여러 나라에서 보았지만 아직 샤르트르 만한 곳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미슐랭 레스토랑이 문을 닫아 맛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스트라스부르는 다시 남부 프랑스 코스로 다시 한번 가고 싶은 아기자기한 동화 같은 곳였다. 못 가본 박물관과 미술관, 문 닫힌 미슐랭 레스토랑 그리고 일정상 포기한 몽쉐미셀의 아쉬움에, 아마 프랑스는 살면서 언젠가 한번 더 찾아갈 것만 같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동화같은 마을 모습

온 마을이 마치 빛의 축제 도화지가 된 듯한 프랑스 샤르트르

7월 출장에는 그래도 한번 겪어 봤던 터라 조금 적응이 되었는지, 아니면 모든 유럽에서의 업무 일정이 끝났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 혹은 좀 더 다이내믹한 국가의 구성이 나에게 좀 더 맞았던 것이었는지, 그래도 제법 여행다운 느낌이 들었다.

시내 어디에서나 눈을 사로잡는 프라하성이 인상적인 체코 프라하

까를교의 슬픈 전설의 깊이만큼이나 오래된 명성을 자랑하는 체코 프라하는 무척이나 운치 있는 곳이었고 수도원의 족발 대짜 같은 꼴레뇨와 시원한 수제 맥주는 대낮에도 프라하의 운치에 취하기 충분하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는 특히 내 기억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잘츠부르크에서 내가 50만 원 정도 현금과 숙소 키, 여권을 넣은 작은 가방을 잃어버려 사방팔방으로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돌아온 숙소에서 직원이 어느 옷가게로 가보라며 쪽지를 전해 준다. 알고 보니 생각보다 날씨가 쌀쌀해 여행 중 입을 옷을 쇼핑하러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 보다 그만 탈의실에다 가방을 걸어둔 채 나온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와 지갑도 코앞에서 들고 간다는 전설의 소매치기로 유명한 유럽에서 제 발로 돈 지갑을 버려두고 나왔는데, 그걸 고맙게도 고스란히 다시 찾아주다니. 오스트리아에 대한 인상이 덩달아 좋아졌다. 잘츠부르크는 궁전과 정원도 귀엽고, 당시 여기서 샀던 옷과 신발도 아직까지 잘 애용하고 있어 나름 마음에 든 도시였다.

사운드오브 뮤직의 도레미 송이 절로 튀어 나올 것 같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지갑을 찾기 위해 저 다리를 수십번 오가야 했다.

정점을 찍은 것은 할슈타트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면서도 기대치가 높았으나 직접 본 할슈타트는 유럽에서 최고 힐링지였다. 가는 길에 잠시 들린 바트이슐의 노천온천은 긴 여정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고, 할슈타트로 가는 길도 예뻤고, 도착해서는 더 예뻤다. 머물었던 숙소는 알프스 산맥의 자락에 위치한 청정의 공기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생수가 방에 있냐 직원에게 물었더니, 여기 수돗물은 알프스 물이라 그냥 먹어도 된다는 직원의 말에 크로아티아의 석회수 물과 달리 유럽에서 이런 곳이라면 나는 평생을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호수가 보이고 뒤로 알프스 산이 펼쳐진 한 장의 엽서와 같던 숙소는 가족단위의 관광객들로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전경

이태리로 넘어가서부터는 소매치기가 많을 것 같아 잔뜩 긴장하고 다녔다. 피렌체는 명성답게 아름다웠고, 말로만 듣던 젤라토 아이스크림은 그 달콤한 맛으로 나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으며, 특히 미술관 투어가 인상 깊었다. 평소 명품을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으나, 한국 대비 반값 가격인 프라다 아웃렛에 들러보고, 로마로 넘어가 남부 투어를 떠났다. 이태리가 왜 그리 소매치기가 많은지 알 것 같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릴 만한 아름다운 곳임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남부 이태리 투어는 만족 그 자체였다. 폼페이의 역사적 설명도 듣고, 특히 아름다웠던 포지타노에서 상큼한 레몬 샤베트를 맛본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야경, 베키오 다리, 미켈란젤로 언덕
이탈리아 포지타노의 달콤한 바다 풍경과 상큼한 레몬 샤베트

그러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장렬히 전사했다.


세 번의 유럽행 모두 항공권조차 내 여비로 낼 필요가 없었고(심지어 6,7,12월은 최성수기), 어차피 출장을 갈 때 보내야 할 비행기에서의 이틀 시간은 추가로 고려할 필요 없이 최소한의 개인 휴가 날짜만 덧붙여도 되고, 유럽에 대한 열망이 피크를 치던 적당한 타이밍에 다녀올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나는 다짐했다. 다음번 유럽행은 그냥 편하게 내 돈 주고 마음 편히 여행으로 가는 걸로. 휴가지에서 계속 노트북으로 메일 체크를 해야 했고, 짐이 무거웠으며, 부담 없을 단순 교육 출장이 아니고서야 업무만으로도 이미 체력과 멘털이 고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는 유럽행 면접과 출장으로 오아시스처럼 유럽에 대한 끝없던 갈증을 채웠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만나자 나의 오랜 유럽에 대한 갈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폭풍처럼 요동 치던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던 유럽을 가보고 싶다는 끝없는 갈망도 이때 유럽을 한번 다녀오고 나니 한차례 잠잠해졌던 것이다. 아마 이렇게라도 우연히 잠시 동유럽과 서유럽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언젠가 나는 회사를 관두고서라도 유럽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차올랐을 것 같다.


이제 당분간 유럽은 안 가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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