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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마음 놓고 잘 수 있다는 건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건강한 신호

by 인생여행자 정연

오후 4시 44분.


참새 소리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어렴풋이 들려오는 새소리가 장맛비의 청량감과 버무려져 그의 귓가에 닿았다.

불규칙한 이 소리의 조합에 신이 정해놓은 듯한 어떤 리듬이 담겨 최면에 빠져들 듯 낮잠에 빠져든다.


한밤에 잘 준비를 다하고 자는 평범한 잠에는 없는 무엇이 이 낮잠에 담겨있다는 것을 사십 년 시간을 보내고서야 발견했다는 사실에 그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뜀박질을 많이 하고 온 날이면 시원한 나무 마룻바닥에 누워있다가 스르륵 잠들곤 했다. 보통 얼마 동안 잠들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시원함과 개운함이 피부 어느 한 구석에 스며들어 증언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낮잠을 누리는 호사는 어느덧 사치재가 되었다.


사치재(Luxury goods) :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능 이상의 수준을 가진 고급 상품으로 생활필수품과 달리 비싼 원료를 가지고 전문가가 소량으로 생산하는 특성을 가지며, 시장 가격보다 높게 거래된다. 사치품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구 등이 필요한데, 처음에는 자급자족하다가 점차 거래를 통해서 필요한 상품을 확보하게 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상품 중에서도 고가의 상품을 구매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 시장에는 사치재와 필수재가 나누어져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치재는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고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생산자가 소량으로 만들어 시장에 비싼 가격으로 판매한다. 예를 들어, 옷의 경우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기본적인 기능 이외에 원단과 디자인 면에서 차별성을 인정받으면 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될 수 있다. 특히 사치재는 높은 가격으로 인해 누구나 쉽게 구매하지 못하기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우월감을 과시하거나 자기만족을 위해 사치재를 구매하기도 한다. - 두산백과 -


공부를 조금씩 맛보기 시작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을 시작으로 입시 학습의 문턱에 들어선 중학생 시절을 거쳐 본격적으로 대입 공부에 매진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면서 낮잠은 그의 삶에서 더욱 요원한 무엇이 되어버렸다. 이따금씩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을 통해 들었던 ‘낮잠의 효용성’에 기대어 낮잠을 자보려 노력해보기도 했지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명한 과학자와 교수, 성공한 기업인이 매일 낮잠을 규칙적으로 자고 이게 바로 그들의 생산성의 비결이라는 이야기도, 적절한 낮잠의 길이는 15분이 좋다느니 1시간 이내가 좋다느니 하는 의사들의 조언도 잠시 곁에 머물다가 떠나간 지인처럼 스쳐 지나갔다고 그는 회고했다.


긴 시험기간을 보내고 나서, 밤늦게까지 공부나 과제를 하고 난 다음날, 쓰러지듯 잠들었던 ‘낮 시간의 잠’이 전부였고 그 역시도 그리 반가운 경험은 아니었다.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듯한 그 경험들은 유쾌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려 노력하고,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또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어른이 되었고, 그렇게 인박힌 듯한 패턴은 그의 삶에서 쉼을 멀리 떠내려 보냈다. 흘러간 그 물줄기 속에 ‘낮잠’도 있었음을 오늘에서야 알아챘다.


오늘 저녁의 걱정, 내일의 염려 없이 오후의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Quality Time, 충만한 현재로서의 삶을 꾹꾹 찍어내며 사는 발걸음이 낮잠이 아닌가 거창한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긴 3주간의 여행에서 오는 여유로움과 의식적인 안도감에, 옆에 곤히 낮잠을 자고 있는 열한 살 아이의 새근새근 자는 모습에, 이런 사치재라면 마음껏 쓰고 싶다며 ‘낮잠’을 다시 청해보는 자신을 마음껏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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