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충만하게 누리는 나만의 비법
살면서 이 순간의 감정과 느낌, 소리와 냄새를 온전히 누리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제주의 풍경을 바라보며 아침 산책을 하다가 든 질문이다. 애써 걷기 명상을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명상이 되었던 이 시간을 더 오래 누리기 위해 기록한다.
주중, 주말을 구분해서 여러 차례 맞춰놓은 핸드폰 알람을 모두 꺼놓고 잠들기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 정도 되었다. 여행 초기만 해도 습관 탓인지, 아니면 휴가 마치고 사무실 출근할 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까 봐 걱정한 탓인지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곤 했다. 다만 새벽 6시가 아닌 아침 7시 정도로 타협하면서. 한번 더 생각해보니 여행의 아침시간을 오롯이 혼자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좋은 자세이긴 하지만 이 역시 조급함과 강박이 묻어있다.
어젯밤, 하루 경험 중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적어 내려갔다. 때론 그 감정과 느낌이 박제되는 것 같아서, 언어의 범위로 한정되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지만, 이 기록이라도 해놓지 않으면 그때의 생각과 감정, 나의 인식과 의지는 어느새 휘발되어 사라지기에 쓴다.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를 새롭게 발견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기도 하다.
어제도 그렇게 기록의 소임을 마치고 알람 설정 없이 잠들었다. 혹시나 오늘 아침 약속에 늦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했지만 그 역시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스르르 눈이 떠진다. 애써 핸드폰 시계를 보지 않는다. 복층형 숙소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우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때론 이런 상투적인 표현이 상황을 적시하기도 한다.)
넓게 펼쳐진 들 너머 나지막하지만 깊어 보이는 제주의 숲이 눈을 사로잡는다. 나는 지금, 여기에 발을 내딛고 있구나. 넓은 풀밭 가장자리를 한발 한발 걷기 시작한다. 이름 모를 새들의 소리, 아침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 옆 집의 개 짖는 소리, 각각 소리를 내지만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언제였던가? 이런 느낌, 이런 기분을 호젓이 누리며 걸었던 것이. 얼마 전 방문했던 복합 문화공간 Piknic의 Meditation 전시에서 했던 걷기 명상도 참 좋긴 했는데, 그 순간을 더 누리려 노력한 나머지, 그렇게 누리려는 나의 의지와 힘겨루기를 했던 기억도 난다.
두 번의 추억이 머릿속을, 가슴속을 스쳐 지나간다. 한여름 LA 외곽 자연을 가득 품은 공간에서 보냈던 2주의 시간, 한겨울 제주 농장에서 제주 산간지역의 풍경을 온몸으로 느꼈던 3주의 시간. 한참 전에 일인데도 어떤 장면들은 생생하게 기억 속에, 몸 깊은 곳에 남아있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여름날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뜨거운 햇볕을 피할 때 이마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이 시나브로 사라지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바라봤던 자연의 모습. 이게 바로 지중해성 기후구나 하며 몸으로 느꼈던 그 순간. 아무도 없는 농장 안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주변이 조용했던지 눈이 내리며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나만의 발걸음으로 수놓았을 때 느꼈던 그 희열, ‘지금, 여기’를 오롯이 걷고 있다는 그 느낌, 살아있다는 기분. 지금 돌아보면 그게 바로 걷기 명상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 아침, 이곳 제주의 풀밭을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다가 예전 LA와 제주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지만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9월에 있을 Journey to now 트립이 기대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셀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숨 쉬는 고래 식구들이랑도 이런 경험의 자리를 갖고 싶다. 선생님께 리트릿 트립 한번 가자고 졸라봐야겠다.
[산책]
그냥 걷는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길모퉁이가 나오면, 쓱 방향을 바꾼다. 모퉁이를 돌면, 길 앞의 풍경이 확 달라진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길도 있고, 뜻밖의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후들거리기도 한다. 넓은 길로 나오면, 머리서 하늘이 이쪽으로 천천히 펼쳐진다. 어느 길이든, 길 하나하나가, 저마다 다르다.
마을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사다리 타기 종이를 스르륵 펼치듯, 길모퉁이를 몇 개나 돌며, 어디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걷는 것을 즐기기 위해 마을을 걷는다. 아주 간단하다.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그럴까? 어디로 뭔가를 하러 갈 수는 있어도, 걷는 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 걷는 것. 그게 쉽게 잘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가장 간단한 것.
- 오사다 히로시, 심호흡의 필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