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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감주 한 그릇

시간의 양과 질에 대한 단상 Re:Collect

by 인생여행자 정연

"죄 다 죽었어. 김상원이도 저번에 가고, 아무개랑 나만 남았지 뭐. 허허." 아흔셋을 맞이하신 할아버지가 아침에 지인에게서 전화를 받으셨다. 조만간 꼭 보자고, 식사 같이 한번 하자고 당부하며 다음을 기약하셨다.


몸이 많이 쇠약해지신 할머니는 집 마당 감나무 잎이 파릇파릇해지던 작년 어느 봄날부터 요양병원에 새살림을 꾸리셨다. 명절 연휴를 맞이해 집으로 마실 오신 할머니는 집에 가자고 하셨다. 나의 성장기에 제2의 엄마셨던 할머니의 기억은 시골 갈현리 집에 머물러계셨다.




눈빛의 총기는 많이 흐려지고 눈두덩의 검붉은 세월의 흔적은 초등학교 때 키우던 나의 알리가 떠나기 전의 모습과 너무 흡사해서 나를 불안케 했다. 금방이라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다가도 이내 시간의 법칙에 사는 생명의 한 단면이라고 나를 위로해본다. 할머니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힘없이 하얗게 늘어져있는 머리칼을 쓸어내려본다. 눈을 힘겹게 뜨신 할머니가 "그런데 너는 누구야? 금촌에 이사했는지도 몰랐네."라고 하시는데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누구보다 아끼셨던 큰손자였는데 그 순간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듯했다.



거실 한편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증손녀와 이제 곧 의젓한 초등학생의 반열에 오르는 증손녀 둘이 한복을 갈아입는다. 한복용 머리띠도 만지작거리며 세배 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이들에겐 설날이란 떡국 먹으며 기다리던 한 살도 더 먹고 세배 이벤트를 통해 사진 세례와 후원금도 두둑이 받는 날이어서 그런지 모두들 신들린 듯 신났다. 나도 한때 나이 먹는 게 좋았던 때가 있었는데.


연공서열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우리나라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의사결정 권한이 커지고 일종의 복지혜택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해왔다. 육체적, 정신적 성장보다는 '나 이제 열한 살이야, 초등학교 사 학년이야, 초등학교 고학년이지. 난 이제 혼자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용돈도 오천 원씩 더 받아.' 이런 사회적 성장을 뜻했다.



모두 함께 한 살씩 먹고 똑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시간은 너무도 달라서 등위적, 등가적으로 바라볼 수 없음을 이 순간 더 실감한다.
명절에만 등장하는 유리그릇에 담긴 달달한 감주 속으로 지난 나의 시간들이 달음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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