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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빛 약속 (a White Promise)

그 빛이 바래지 않길 바라며

by 인생여행자 정연

한 배달 앱에서 내놓은 스티커형 일력 첫 장에 올해 다짐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건 계획이라기보단 나를 향한 다짐이란 표현이 더 적절했다.


영화 러브 레터의 한 장면처럼 흰 눈이 펄럭 펄럭 내리는 날, 로맨틱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회색빛 공장 한 켠 당직실에서 새해 첫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덟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난 다섯 평 남짓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물론 공장을 지키는 일,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일을 하러 출근한 것이지만 사실 '남겨졌다'라는 게 더 맞는 말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손동작마저도 귀찮아질 때 즈음 오늘이 1월 1일이란 사실을 의식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렇게 그냥 시간을 보낼 순 없지.'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하릴없이 A4 용지 두어 장을 프린터 용지함에서 꺼내 끄적이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단어, 문장, 해야 할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 둘 써나가다 보니 어느덧 하얀 종이 위엔 까만 글자가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가운데 정수를 길어 올려 새해 일력 첫 장에 새겨 넣었다.




새해맞이 준비를 할 때면 우리 집에선 으레 묵은쌀 두 말을 시장으로 보내곤 했다. 하루는 할머니 손을 잡고 동네 재래시장에 갔는데 떡집을 가득 채운 하얀 김이 마치 안갯속을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구수하게 잘 지어진 쌀 두 말을 커다란 은빛 알루미늄 주둥이에 넣고 나무주걱으로 꾸욱 꾸욱 눌러준다. 기계 아랫부분 구멍에선 하얀 기다란 똥 같은 가래떡이 뜨끈한 물이 담긴 다라에 똬리를 틀며 자리를 잡는다. 떡집 아주머니는 타이밍을 놓칠세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래떡을 이내 쭉 끌어내선 일정한 간격으로 뚝뚝 썰어낸다. 마치 떡집 아줌마의 숭고한 미션인 것만 같았다. 일곱 살 언저리에 본 그 생경한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


떡집 아저씨가 자전거에 가래떡을 싣고 우리 집에 도착하면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마루에 커다란 상 두 개를 펼쳐 놓으셨다. 그러고 나면 할머니랑 어머니는 가래떡을 한 줄 한 줄 정성스럽게 상 위에 올려놓고 말리기 시작한다. 꾸덕꾸덕 떡이 다 굳어가면 어슷 썰기를 해서 적당하게 여러 묶음으로 나눠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넣으면 새해 떡국 준비가 끝난다.



가래떡. 칼을 대지 않은 그 기다란 가래떡을 떠올릴 때마다 난 시간을 떠올린다. 끝이 없을 것처럼 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떡이 마치 내게 주어진 시간 같다. 칼 안 댄 그대로의 긴 가래떡이 일 년이란 시간이라면, 칼로 길게 끊어낸 가래떡은 한 달, 어슷썰기 한 한 조각의 가래떡은 하루 같다.


어쩌면 난 내 시간을, 나만의 한 해를 남들이랑 똑같이 늘 그렇게 썰어놓고 나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다짐하며 살아온 것만 같다. 그것도 모자라 하루란 떡 조각을 시간표에 맞춰 깍둑썰기를 해왔으니 온전히 시간이란 가래떡 맛을 느낄 수 있었을까? 되뇌어본다.


11월 11일, 까만 초콜릿이 덧입혀진 빼빼로, 그 빼빼로의 날, 난 의식적으로 하얀 가래떡을 떠올리며 주변에 인사를 건넨다. 회사 업무 메일 첫 문장도 '가래떡 데이 안부 인사'로 채웠다.


11월엔 늘 뭔가 시렸다. 날씨도 추워지고 코 끝의 바람도 낯설었다. 추위에 적응 안 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가을 날씨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학생 시절엔 기말고사나 모의고사 준비로 마음이 분주하고 우울하기도 했다. 12월이 주는 마지막이란 느낌도 없고 뭔가 어정쩡하기만 했다. 휴일도 없는 한 달 달력을 바라보며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고 30일이란 시간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어서 이 한 달이 지나가기만을 유독 바랬던 것 같다. 그러면서 4월도 약간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4월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몸과 마음의 에너지 그래프가 우하향이라는 점일 거다. 문득 지난날의 11월을 추모한다. 너무도 그냥 떠내려 보낸 시간들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똑같이 주어진, 아니 새롭고 새로운 하루하루의 시간들인데 난 그걸 공용화장실 휴지 쓰듯이 마구 써댔으니.




용맹한 아톰 애니메이션이 그려져 있는 내 몰스킨 노트엔 벌써 내년에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빼곡하다. '아, 이렇게 또 일 년을 보낼 작적인가?' 나에게 따져 묻는다. 그리고 다시 펜을 든다.



1. 내게 주어진 열두 달, 삼백육십오일이 기다란 가래떡이라면 나 그 떡을 떡집 아줌마처럼 균일하게 칼로 썰어내지 않으련다. 나만의 호흡으로 살다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맨손으로 뚜욱 떼어다가 따끈하게 입에서 베어 물 테다.


2. 할머니가 그랬듯이, 가족, 친척, 이웃들이랑 그 떡을 나누면서 함께 그 시간을 즐길 테다.


냉동실 한 편에 비닐봉지로 꽁꽁 싸매 두었던 어슷 썰어놓은 가래떡을 꺼냈다. 하얀 가래떡 조각들이 까만 프라이팬 위에서 누렇게 익어간다. 바삭하게 씹히는 그 식감에, 곱게 화장하고 누워계셨던 하얀 할머니 얼굴이 스쳐간다. 몇 줄 더 적을 힘이 난다.




[ 내 인생 세 줄 (묘비에 쓸 말) ]


My Pleasure! 를 즐겨 쓰던 사람,

듣기를 좋아하고 공감에 희열을 느끼며

타인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때

행복하다고 말해온 사람, 여기에 눕다.


오롯이 혼자일 때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을 거름 삼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소중함과 행복을 절절히 누리고 가다.


텅 빈 마음으로 막연한 꿈을 좇다가 또렷한 소망을 가슴에 담고 가다.



#인생여행자 #떡생각 #새해생각 #인생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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