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세요?’의 다른 질문
요가 수련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꼭 해본 경험이 있는 아사나가 있다. 바로 ‘사바아사나’로, 우리말로 ‘송장 자세’다. 처음 단어 뜻을 들었을 때 ‘송장도 자세가 필요한가?’라는 우스운 질문도 들었었는데, 말 그대로 망자의 자세, 망자의 모습을 말한다.
숨을 몰아쉬며 어려운 아사나 플로우를 모두 마치고 맞이하는 사바아사나는 진정 ‘꿀맛 같은 휴식’이다. 모든 요가 수련은 결국 이 사바아사나를 향해 가는 길이다. 요가 수련을 매번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의 체험이라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이유다.
제2의 엄마로서 늘 옆을 지키셨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입관 전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녀의 자세도 ‘사바아사나’였다. ‘나도 언젠가 이 모습으로 누워있겠지?’ 막연하지만 선명한 질문을 품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태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문장처럼 참인 명제는 없다. 학교 다닐 때부터 들어서 익숙했던 말이지만 이 문장을 가슴에 품은 건 어른이 되고 나서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이 문장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의 아툴 가완디 책을 깊이 읽어냈던 시절이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책도 함께 탐독했던 그때 역시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사람이란 존재는 참 미련하게도 가까운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그제야 죽음의 문제를 개념의 영역에서 내 삶의 영역으로 데리고 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깊게 묻고 되묻다 보니 어느 순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질문이 바뀌었다. 그제야 삶은 죽음에 기반을 둘 때 비로소 빛난다는 사실을 매만지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한 번뿐인 내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에서 휘돌아 나오는 이 질문들을 마주할 때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답을 유보하고 싶은 충동은 습관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질문을 직면할 것이다. 더욱더 마주하고 비벼대고 주물러서 내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물성이 있는 무엇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타일러 라쉬의 ‘두 번째 지구는 없다’를 펼쳐서 몇 장 읽는 사이 내 흥미는 쉽게 휘발되고 말았다. 나의 삶을 내밀하게 바라보고 하루하루 분투하며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내게, 전 지구적인 과제 ‘기후 변화’를 가슴에 품기엔 너무도 거시적이고 먼 이야기만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의 앞부분에 나왔던 인물도 스쳐 지나갔는데, 그는 기후 변화 위협으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자식을 낳는 것도 두려워했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품기에는 너무 먼 과제 같다는 파편적인 인상을 여러 콘텐츠에서 받곤 했다.
‘내 꿈은 기후 위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라고 외치는 타일러 라쉬의 말이 멋지게 들리긴 했지만, 나의 삶과는 거리가 꽤 먼 것처럼 느껴진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당면하는 일상의 삶의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지구의 다른 지역 이야기나 미래에 펼쳐질 ‘6도의 멸종’ 같은 시나리오는 내 머리나 마음에 둘 자리가 없는 것이다. 호기심으로 관심을 두는 차원의 일은 할 수 있다. 일종의 유희 활동처럼 말이다. 하지만 삶을 추동하는 핵심 주제로 삼기에 나는 그리 전 지구적이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확실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어느 날부터인가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머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절절히 알고 있다. 가깝게는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내가 속한 커뮤니티, 지역사회, 사회, 국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경험한다.
더는 사회, 경제, 정치 이슈에 한눈을 감고 살지 않는다. 내 이웃의 문제이고 결국 나의 과제가 될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신경을 쏟고 싶지 않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데, 고작 목소리 내길 주저하겠는가.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게 목소리를 못 낼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략)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한 것도 필요 없다. 다만 깨어 있고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게 중요하다.’ (타일러 라쉬)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은 공명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명확히 짚어낸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타일러 라쉬는 기후 위기 문제 해결을 그 방향으로 잡았을 뿐, 마음의 기반은 나와 같구나 싶었다.
움켜쥐듯 살기에 삶은 허무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레처럼 나의 명예, 부, 권력, 건강 모든 건 어느 순간 나를 떠날 것이다. 심지어 손에 쥐고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조차 불안과 염려,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영원히 변치 않는 가치, 나란 존재의 자산으로 남을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만이 진정한 ‘내 것’일 것이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처럼 변하지 않을 가치가 내 삶에 투영되어, 나를 통해 나타날 때 그 삶의 열매만이 영원하다고 믿는다.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리라.
그런데 나는 나약하다. 매일 좌절하고 실패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이상과 현실의 틈에서 고민하고 부유한다.
혼자라면 외롭고도 외로울 것이다. 바로 고꾸라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삶의 여정을 함께 하는 도반이 있기에, 떨리는 두 무릎을 굳게 세워 앞으로 걸어 나갈 힘을 얻는다. 서로를 향한 위로와 사랑이, 응원과 나눔이 나를 살게 하고 너를 살게 하고 우리를 함께 살게 한다.
글 | 황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