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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머물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나의 삼스카라(Samskara)에 대하여

by 인생여행자 정연

‘글쓰기와 요가’ 수업에 참여하며 ‘삼스카라(Samskara)’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두 가지였다.


수영장 한 편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모습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면서 되짚어보며 그 주변을 맴도는 마음이 조급해진 ‘어른이’의 모습이었다.




어릴 때 수영장을 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제2의 엄마처럼 늘 곁을 지키셨던 할머니는 맏손주가 위험한 활동 하는 걸 매우 싫어하셨다. 당시 대가족 체제에서 실질적 서열 1위셨던 할머니의 입김에 어머니도, 나도 그 뜻을 꺾기엔 턱없이 힘이 부족했다. (물론 내가 떼 썼으면 해주셨을 수도 있는데 어린 나는 특히나 더 순응적이고 순종적인 아이여서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영장, 스케이트장, 스키장을 거의 가보지 못했다. 물에 빠질 수도, 손이 베이거나 허리를 다칠 수도,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랬기에 지금까지 크게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이렇게 숨 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장면에 명암이 있듯이, 안전한 삶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 여파로 도전에 취약해졌다. 특히 몸을 적극적으로 써서 새로운 걸 시도하는 스포츠 활동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평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으로 달리기를 잘 못 했던 것도 한몫했고, 한창 축구를 즐기던 초등 4학년 시절의 자책골 경험은 확실히 하향 변곡점이 되었다. 그럼에도 걷거나 뛰는 걸 기반으로 하는 운동은 잘 못 해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수영은 전혀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먼저, ‘겁 없이 물어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대학 시절 물에 빠질 뻔한 경험이 있었던 이후로는 더욱 물이 무서워졌다. 일단 물에 들어간다고 해도 ‘물에서 숨을 쉴 수 있어야’ 하는데, ‘음~파~ 음~파~’만 연신 해댔지 물에서 숨쉬기란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졌다. 두려움과 좌절이 온몸을 감싸고 파고들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수영장에서 어깨 움츠리고 카메라 앵글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초등학교 남자아이의 모습’이다. 오래된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 한 장이기도 한데, 그 어린이가 늘 내 안에 어딘가에 살고 있다가 내가 두려워할 때, 취약한 상황이 될 때면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압도한다.





몸을 움직여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자존감을 높일 수 없던 나는 부지 부식 간에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앎의 기쁨으로 학습 자체가 재미있을 때도 있었지만, 부모님 등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동기였다. 스스로 세워놓은 학습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했고, 주변 친구들을 보면 경쟁심을 갖기보다는 나 자신과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시절 대부분을 이른바 ‘전교 1등’으로 살았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으로 산다는 건 안 좋은 점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다. 선생님들과 주변 어른들에게 칭찬받을 일이 많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권력 같은 것도 있었다고 추억한다. 마치 어른들 사이에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에 따라 파생되는 권력처럼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런 권력이 분명 존재했다.

나 역시 그 권력을 보이게, 보이지 않게, 의식하면서, 의식하지 못한 채 휘두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며 이삼 년 앞서 선행 학습을 해온 내 또래 아이들을 학원에서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걸 발견했다. 몸이 아닌 머리를 기반으로 쌓아온 자존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나 자신과 경쟁하지 않고, 주변 또래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늘 시간의 압박 속에서 살았으며, 그 강박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내 몸에 커다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완벽에의 충동’을 가슴에 품고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마음속 용수철이 그 탄성의 한계를 넘어서서 ‘팅~’하며 늘어져 버렸다. 표면적으로 내 삶이 부서지진 않았지만, 지칠 대로 지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끌려가듯 꾸역꾸역 살아낸 시간이 꽤 길었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면서 되짚어보며 그 주변을 맴도는 마음이 조급해진 어른이’의 모습은 그렇게 온전히 나의 삼스카라가 되었다.

매트 위에서 요가 수련을 할 때도 이 두 가지 삼스카라가 너울지는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진다. 깊은 호흡을 내쉬고 마시면서 떨쳐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오랜만에 이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살며시 안아본다.


글 | 황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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