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Re:Collect
Code #001
MUJI hotel Shenzhen이란 글자에 또박또박 힘주어 새겨 넣은 듯한 볼드체 조명을 뒤로하고 고가도로 아래로 뚫린 토끼굴을 걸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괜한 짓 하는 거 아닌가 몰라.”
Gao de Ditu, 전에도 썼던 지도 앱이라 낯설진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택시를 타고 있었고 지금은 걷고 있다. ‘아니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는 낮에 동료랑 같이 이동하고 있었고, 지금은 늦은 저녁에 나 혼자 걷고 있지.’ 그 생각에 다다르자 그는 토끼눈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좁다란 터널을 나오니 확 트인 공간에 커다란 회색 건물이 그의 망막에 잡혔다. 정확하게는 그의 뇌가 오성홍기에 그려진 별들이 박힌 간판을 보며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새삼 인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이 도시를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설명했던 게 생각났다. 당시에는 ‘실리콘밸리’가 먼저 귀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중국’에 방점이 찍힌다. 둔탁하고 커다란 철문 앞을 지났다. 친절하게 영문 병기된 간판을 보고 우리나라 '지방법원' 정도의 건물인가 생각했다. 이내 더 빨라지는 발걸음을 그는 금세 알아챘다. ‘돌아갈까?’
지도 앱을 확인하니 이제 3분만 더 걸어가면 된다고 한다. 이미 15분을 걸어왔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이 깜깜한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두 가지. ‘지나간 15분의 시간은 Sunk Cost야. 경제학 시간에 배웠잖아. 이미 매몰된 비용이니 현재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두면 안된다고.’ 또 다른 그가 말하기 시작한다. ‘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창피하게 그냥 돌아가게?’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이런 논리적 토론이 머릿속에서 펼쳐지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갑자기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도 잠시, 그의 눈에 ‘LaJia Yoga’라고 쓰여있는 형광색 간판이 들어왔다.
약간의 두근거림. 긴장과 설렘의 이 느낌을 그는 안다고 생각했다. ‘불규칙한 맥박, 이마 앞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감지하는 촉각의 민감도로 그 두근거림을 계량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다시 이미지화해서 여러 색깔의 교차되는 흐름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까?’
요가 스튜디오 문이 묵직한 철문이었는지, 하얀 나무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문을 활짝 열었을 때 마주쳤던 여섯 개의 눈동자와 표정만을 기억했다. ‘이방인.’ 그의 뇌리를 스친 단어였다.
오 년 전, 그는 우연히 요가를 시작했다. 한때 재미를 붙여서 주 4일 참석하며 예상치 못한 체중감량도 쏠쏠하게 맛봤던 운동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경기에서 자책골을 넣은 이후 그에게 스포츠는 ‘내가 못하는, 재미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요가 전도사’라고 불릴 정도로 요가에 빠진 것은 기적에 가깝다.
요가 몰입기 - 부상 후 회복기 - 요가 몰입기 - 부상 후 회복기를 두어 번 반복하며 깍두기처럼 짜인 시간표에서 스치듯 만나는 요가 선생님과 건조하게 요가 시퀀스를 나누는 행위에 싫증이 났다. 나의 이름이 불려지고, 관계가 이어지고, 의미 있는 성장이 있는 곳’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숨 쉬는 고래 요가 스튜디오’를 새롭게 만나며 다시 요가에 흥미를 붙였다.
출장. 영어로는 Business trip. ‘Business trip도 Trip이니까, 여행이지.’ 뭔가 궤변 같은 한 문장에 그는 힘을 받곤 했다. ‘일하러 출장 가지만 남는 여유 시간, 개인 시간에는 잠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다.’라는 면죄부를 받은 것만 같았다. 이번 출장을 앞두고도 그는 이 문장을 떠올렸다.
‘저녁 자유 시간에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 관심 있는 게 뭐예요?’ 그가 즐겨 던지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봤다. 그러자 ‘요가’라는 단어가 메아리치듯 돌아왔다. ‘아, 그래. 출장 가서 요가를 해봐야겠다.’
이 짧은 연상작용이 지금 그를 이 낯선 땅, 중국 션전의 이름 모를 건물로 데려왔다.
십자 모양으로 겹쳐서 펼쳐진 요가 매트 가운데 앉아서 선생님을 대면했다. 짧은 중국어였지만 선생님의 첫 질문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요가 수업을 중국어로 진행할까요? 영어로 진행할까요?”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잉위.(영어).”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평소 수업하면서 들었던 영어 표현이 그나마 익숙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요가 선생님의 표정은 친구가 정성스럽게 만들어내 온 요리를 한 숟가락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덩이시야.(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접수 데스크로 나가서 요가 스튜디오 원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하며 불안해졌다.
모든 말을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가 이해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죄송한데 제가 영어로는 수업을 할 수가 없어요. 영어로 수업이 가능한 선생님이 계시는 날 다시 오시면 어떨까요?’ 난감했다. ‘내가 여기를 어떻게 찾아왔는데. 이렇게 돌아갈 순 없지. 그래, 그건 안돼.’ 그는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이렇게 외치고선 온화한 미소를 한껏 띠며 “쭝구어.(중국어.)”라고 얘기했다. ‘중국어로 수업하시면 보고 따라 할게요. 보면서 따라 하면 돼요.’라는 말을 ‘중국어’라는 한마디와 바디랭귀지로 전했고 선생님도 온전히 그 의미를 이해한 듯했다.
그렇게 수업은 시작됐다. 중국어를 잘 못 알아듣는 한국인 수련생과 중국어 수업만 가능한 중국인 요가 선생님의 세기의 수업. 그 장면을 사진으로 담았다면 퓰리처상 후보도 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은 먼저 가부좌를 하고 호흡하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복부 아래쪽을 최대한 등 쪽으로 당긴 상태에서 갈비뼈를 활짝 열고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갈비뼈를 최대한 닫으며 숨을 내쉬는 호흡법. 그는 어렵지 않게 ‘우짜이 호흡법’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호흡을 따라가면서 그는 서서히 요가 플로우에 빠져들고 있었다.
팔을 풀어주고 다리를 이완시키고 허리와 목, 어깨까지 ‘바디 스캔’하듯이 몸 곳곳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대략 알고 있는 아사나(요가 자세)는 좀 더 손쉽게 따라 할 수 있었고 그러면 선생님은 어김없이 ‘뚜이.(맞아요.)’하고 화답해주었다. 잘 모르는 동작들을 할 때나 아는 동작이라도 자세가 틀리다고 생각하면 선생님은 미세한 각도까지 짚어주면서 바른 자세로 아사나를 하도록 섬세하게 도와주었다. 선생님도 그도 땀방울을 뚝뚝 흘려가며 도자기를 구워내듯 요가 동작들 하나하나를 만들어갔다.
지금까지 그는 운동이든, 공부든, 하물며 일을 할 때에도 ‘한 명의 코치가 전담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주는 코칭’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다. 이 중국인 선생님의 일대일 코칭이 참 낯설었다. 하지만 좋았다. 무엇이 ‘좋다’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만 집중해줘서. 진심으로 잘 가르쳐주려고 해서. 내가 정말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등등의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아사나를 마치고 이마와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그는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코치가 되고 싶어.’
그 사이 하늘은 깊은 숲 속의 낯빛이 되어있었다. 한번 지나온 길이어서인지, 왠지 모를 자신감이 솟아서인지, 매일 다니던 하굣길을 걷는 것처럼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토끼굴을 다시 걸어 나올 때 마주한 호텔 조명은 더없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