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Aug 01. 2022

살라, 한 번도 절망한 적 없는 것처럼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TBS, 2018)>

"미스미 씨는 절망 같은 거 안 할까요?"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


인스타그램에서 다양한 영화, 드라마 명장면을 제공하고 있는 리플레이 필름(@replay_film)이란 계정이 있다. 이 계정에서 만난 <언내츄럴>  속 명대사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건지, 미스미란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웨이브를 통해 일본 드라마를 시청했다.


미스미(이시하라 사토미 분)는 부자연사 규명 연구소, 일명 UDI(Unnatural Death Investigation)에서 근무하는 법의학자다. 연구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이곳에서 부자연스러운 사인으로 사망에 이른 사람의 시체를 부검하여 사인을 규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참고로 UDI는 꽤나 실제적인 기관처럼 등장하나, 가상의 공간이라고 한다.


UDI는 개인의 요청으로 부검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주로 병원과 경찰 등 기관을 돕는데, 부족한 감식반을 대신 현장에 나가는 경우도 있다. 미스미 팀은 감식반 대신 연탄가스로 집단 자살을 한 사건 현장을 찾아 사인을 밝히던 중 시신들 사이에서 사건과 무관한 동사에 의한 죽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인을 분석해 가던 중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미스미와 쿠베(쿠보타 마사타카 분)는 범인이 범행에 사용했던 냉동차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트럭은 증거인멸을 시도한 범인에 의해 저수지에 버려지게 되면서 두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점점 물이 차오르는 트럭 안에서 구조팀을 기다리고 있지만 구조될 희망이 점점 사라지자 쿠메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절망밖에 할 게 없는 상황에서 미스미는 사과를 건넸다. 자신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게 됐다며, 내일 저녁에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사과의 의미로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트럭 안에 물은 턱 끝까지 차고 있었다. 발을 딛고 있기도 힘들어 벽과 서로에게 의지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내일' 시간을 묻다니. 쿠베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내일?", "내일". 차가운 저수지 물에 얼음장처럼 굳어가던 두 사람은 내일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따뜻한 된장국이 먹고 싶다던 미스미에 말에 그만 피식, 웃고 만다. 두 사람은 다행히, 무사히 구조되었다. 쿠베는 죽을 뻔한 상황에서 담담하게 내일을 말하더니 이내 웃음을 만들어낸 미스미가 궁금해졌다. 미스미씨는 절망 같은걸 하지 않냐고 묻자 이때 나를 이 드라마로 이끈 대사가 나온다.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 그러니까 이 대사는 죽음의 문턱을 가까스로 지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그녀는 정말, 절망 같은걸 하지 않는 건가?

쿠베가 이렇게 생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미스미는 과거 일가족 집단자살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녀가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지금은 입양되어 이름도 바뀌었고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그 사건의 생존자가 미스미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지만, 그때 일을 말하면 사람들은 살아남은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을 거라는 우려의 말을 하곤 했다. 우연한 기회에 미스미의 과거를 알게 된 쿠베는 그녀가 정상적으로 자리지 못하기는커녕, 실력 있는 법의학자로 자신이 하는 일에 철학을 갖고 있는 멋진 사람으로 성장했음을 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런 일들을 겪고서도 마치 절망 같은 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처럼 어떻게 내일을 향해 오롯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그녀를 절망 같은 건 모르는 사람처럼 만든 것인지 말이다.


쿠베는 모르겠지만, 나는 1화에서 미스미가 부검한 남성의 약혼녀를 만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보았다. 사랑하는 이가 외롭게 죽은 것도 슬픈 일인데 성실했던 사람이 전염병을 퍼트린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죽어서 손가락질받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약혼녀는 혼자 살아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미스미는 그런 여자에게 단팥빵을 건넨다. 달고 맛있다고. 그럴 기분 아니라며 거절하는 여성에게 미스미는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먹어야 돼요." 그 말을 하고 단팥빵을 입 안 가득히 넣고 먹는 미스미의 표정은 슬픔을 삼키는 얼굴이었다.


드라마의 첫 시작은 옷을 갈아입는 케비넷 실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미스미를 보며 동료 쇼코가 아침부터 튀김 메뉴는 과하지 않냐는, 이런 식의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이었다. 힘겨운 사건이 끝난 후 미스미가 혼자 책상에 앉아 주먹밥을 먹거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저녁을 먹거나, 팀 사람들과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드라마 <비밀의 숲(tvN, 2017)>을 볼 때 황시목 검사가 뭐 좀 먹으려고 하면 중요한 전화가 걸려오거나, 누군가 찾아오는 등으로 식사를 방해 받았다. 시청자들은 이렇게까지나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는 주인공은 처음 봤다면서, 황시목이 언제 밥을 먹을까 그날만을 기다린다고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먹어야 산다. 이 당연한 말이 절망 속에 갇힌 이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가족이 전부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미스미는 살아남은 자가 갖는 죄책감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 날마다 부검하는 시신들을 보며 미스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여럿 겪었기 때문에 절망에 익숙해졌다거나, 그 정도쯤은 괜찮거나 한 게 아니다. 희망이 모두 끊긴 순간에 찾아오는 절망은 그렇게 쉽게 익숙해지거나 괜찮아질 수 없다. 오히려 과거의 사건이나 매일 목도하는 죽음의 흔적은 그녀의 삶을 계속 흔든다.


미스미는 절망에 괜찮지 않아서, 괜찮을 수 없어서, 절망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아 절망하지 않기로 한다. 그녀가 법의학자가 된 것도 절망을 이겨내기 위함이다.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감춰진 진실을 찾는다는 건 부조리한 죽음에, 절망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밝혀진 진실은 죽은 자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일로 떠난 자와 남겨진 자 모두에게 제대로 된 ‘마지막’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다. 그러니까 미스미는 매일 부검을 하며 절망에 지지 않기 위해 싸워왔다. 맛있는 걸 먹고 잠을 자며 그렇게 내일로, 미래로 나아갔다.


  미스미가 음식을 먹는 장면이 절망을 이겨 내는 중이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를 먹던 그녀의 표정이 단팥빵을 먹던 표정과 많이 닮았던  같다. 절망을 이겨내기 위한 치열한 식사. 하지만  모습이 슬프다거나 고독해 보이거나, 불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 고민하며 그녀가 찾아낸 해답이었기에 살아내는 절박함을 느끼게 했고, 살아가는 강인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강인함은 UDI 사람들 안에서도 느껴진다. 여러 사건의 사인을 밝히면서 이들이 왜 UDI로 오게 된 건지 하나, 하나씩 밝혀지는데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법의학을 통해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밝히면서 이들도 절망을 떠나보낸다. 죽음을 죽음을 가까이 둔다는 건 마치 절망과 친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삶과 죽음 모두를 소중히 여기게 한다. 의사가 되길 강요받던 쿠베도 죽은 이들을 위한 법의학을 두고 "미래를 위한 일이야"라고 했던 미스미의 말을 마침내 이해하게 되며, 그려지지 않았던 미래를 살아간다. 절망에 지지 않으려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내일'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드라마 <언 내추럴>을 보는데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시가 생각났다. 이들은 마치 "살라, 한 번도 절망하지 않은 것처럼" 같다. 절망이 주는 고통을 모르지 않기에 절망을 피하려고 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절망은 인생에 한 번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절망할 틈이 없다며 절망 앞에  오히려 '내일'을 이야기하는 <언 내추럴>은 그래서 강인한 기운을 풍기나 보다.


점점 안정적이 되고, 다칠 일 없는 길로만 걷는 조금은 나약하고, 어쩌면 비겁해진 나는 자신의 일을 다 해내고 웃어 보이는 미스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는 기분이었다. 겁내기보단, 절망을 이길 생각을 해봐야지. 설령 절망이 찾아오면 맛있는 거 먹고 잠을 잔다는 미스미의 방식을 빌러 절망을 넘어가다 보면 괜찮아질 내일이 또 올 테니까. 그들이 만났을 강인한 내일을 만나보고 싶다.




언 내추럴 10부작 (2018)

제작. 채널 TBS

감독 츠카하라 아유코 극본 노기 아키코

이시하라 사토미, 이우라 아라타, 쿠보타 마사타카, 이치카와 미카코, 마츠시게 유타카 등 출연

#웨이브 #웨이브 오리지널_언내추럴 #언내추럴 #일본드라마 #법의학


본 원고는 wavve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아 주관적 평가를 포함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더 열심히 나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환혼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