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TBC, 2021)>
제주도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올해 2월, 우면산을 오르면서 제주도 한라산 등반을 꿈꿨다. 설산이 보고 싶었다. 년 초가 되면 예능에는 한라산 설산을 등반하는 연예인들이 자주 나온다. 그들을 보며 나도 브라운관이 아닌 이 두 눈에 황홀한 풍경을 담고 싶었다. 해가 시작되면 막연히 바라던 소망이었다. 우면산을 오른 건 아빠의 잔소리가 8할이었다. 운동 좀 하라는 말에 등 떠밀리듯 뒷 산으로 향했는데 오르다 보니 갑자기 올해 겨울에 한라산에 가자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비루한 체력 탓 인지, 고작 293m밖에 되지 않는 동네 뒷 산을 오르면서 1,974m 높이의 한라산을 꿈꾼 탓인지 나의 등반 계획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나도 내 체력이 형편없음을 안다. 3, 4월 달까지는 산을 오를 때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숨이 가뻤다. 처음엔 어지러움 증 때문에 우면산 정상까지 올라가지도 못했다. 심장은 이미 제 위치를 잃어버리고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뛰는 듯했고, 이어폰 노랫소리를 뚫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일주일에 한 번, 때때로 공휴일이 생기면 산에 올랐다. 그리고 5월과 9월엔 인근 청계산에도 다녀왔다.
고작 이 정도로 될까? 의심하던 내게 2022년 시작을 히말라야에서 맞이한 친구가 충분하다고 했다. 꾸준히만 오른다면, 한라산의 긴 코스를 오를 체력을 기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일 년에도 여러 차례 국내외 산을 오르고, 걷는 게 직업인 친구는 우면산을 오르며 한라산을 꿈꾸는 나를 비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덕에 나는 믿음을 갖고 매주, 틈나는 대로 우면산을 올랐다. 이제는 심장이 제자리에서 뛴다. 사족보행처럼 허리를 굽히고 힘겹게 올랐던 청계산을 사람답게 오를 수 있게 됐다. 체력이 조금씩 붙고 있음이 느껴졌다.
언젠가 이런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일본 드라마 <꾸미는 사랑에는 이유가 있어>에 나오는 마시바 쿠루미(카와구치 하루나 분)는 하야마 쇼고(무카이 오사무 분)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도 그처럼 괜찮다고 생각하는 물건, 이거다 싶은 것들을 모아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회사 SNS을 관리하며 대내외 상품을 홍보하는 홍보과 직원으로 그 마음은 ‘언젠가’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내겐 한라산 설산 등반이 그랬고, 내 이야기를 묶은 책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그랬다. 이외에도 하고 싶고 것이 많다. 나중을 위해 몇 가지 더 나눠보자면, 부담 없이 들려서 따듯한 한 끼를 먹고 갈 수 있는 소박합 밥 집이나 가장 편안한 차림으로 들려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가도 좋은 동네 서점, 일이나 만남이나 기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연결해주는 일 등이 그렇다.
하지만 전부다 막연한 일이다. 생계와 직접적인 일도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살 수도 없고, 쿠루미처럼 그녀가 바라는 일은 상품 기획부서의 일이었다. 다른 팀의 일을 함부로 넘겨볼 수도 없고 그랬다가 실패하면? 그래서 ‘언젠가’라는 추상적인 미래에 마음을 가져다 놓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언젠가’에 둔 마음들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때론 버거운 현실에 부딪힐 때면 이따금 떠올라 뒤숭숭한 마음을 만들었다.
‘언젠가’가 ‘지금’이 될 순 없을까?
우면산을 오르면서 ‘고작’이란 생각은 계속 든다. 요즘엔 45분이면 올랐다 내려오니 이걸로 충분할까, 의심이 든다. 그래도 처음을 생각하면 ‘고작’ 일 수 없다. 만약 그때 내가 뒷 산 오르기를 의심하며 그만두었다면, 한라산 설산 등반은 또 ‘언젠가’로 밀려났을 테다. 엉망진창이고 오탈자도 수두룩 하지만 재작년 자가출판으로 책을 낸 일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고 사소한 몸짓이지만 ‘언젠가’를 ‘지금’으로 만든 소중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의 바람은 이미 우리 삶에 녹아져 있을지 모른다. 쿠루미가 홍보팀으로 회사 SNS을 관리하면서, 개인 계정을 만들어 회사 계정에 다 담지 못한 그 외 좋은 상품들과 일상에서 발견한 괜찮은 물건들을 사용하는 일상을 올렸다. 그녀는 ‘언젠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잡 일에 쫓겨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있어라고 말했지만, 이미 그녀의 계정을 통해 사람들에게 좋은 물건을 발견해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쇼고 사장이 “10만 명 이상의 팔로워가 있고, 전 세계와 이어져있어.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고 한 데는 계정을 크게 키운 그녀의 실력이 바라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던 거라 생각한다. 그 말에 용기를 낸 쿠루미는 엄마의 SNS에서 본 리사이클 조명 가구를 직접 보고 상품성을 파악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더 이상 ‘언젠가’란 미래에 마음을 두지 않고, ‘지금’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어쩌면 당신의 삶에도 ‘언젠가’는 이미 시작됐을지 모른다. ‘고작’이라 생각하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작고 사소한 몸짓이 ‘지금’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시작하면 된다. 이러면 ‘말은 쉽지’라고 생각할 텐데,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면 ‘그래 쉬운 것부터 하자’라는 생각으로 말을 뱉는다. 입 밖으로 꺼내면 막연한 생각은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한라산에 가고 싶단 나의 바람은 비웃음을 샀지만 말을 꺼낸 덕분에 ‘산’ 친구의 조언과 격려를 들을 수 있었고, 지지해준 그녀 덕에 나는 매주 우면산을 오를 수 있었다. 쿠루미 역시 쇼고 사장에게 자신의 바람을 말한 적 있다. 이를 기억한 사장이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언젠가’는 언제 시작될건지 물었다. 그 순간에도 쇼고 사장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사업을 위해 대표자리를 내려 놓고 인도를 다녀오는 중이었다. 그는 매순간을 ‘지금’으로 만드는데 능통한 사람이었다. 혼자라면 못했을 일을 함께 기억해주며 바래준 사람들 덕분에 ‘언젠가’에 두었던 마음이 자주 ‘지금’, 현실에 존재하게 됐다. 그들이 보여준 용기 덕분에 무엇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설령 사소하다할지라도 ‘지금’ 무언가 행동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이미 ‘지금’에 닿은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위 글 속에 막연한 나의 바람들을 남겨봤다. 우선 말이라도, “언젠가는 지금부터니까. 지금부터 해야 해.” 라는 심정으로.
12월에 한라산 등반기를 통해 이뤄진 ‘언젠가’를 나눌 때, 어디선가 들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삶에 ‘지금’ 이뤄진 ‘언젠가’에 대한 이야기를. 그게 당신의 이야기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