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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r 11. 2018

나는 어쩌다 시를 읽게 되었을까?

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이곳저곳을 서성이던 발걸음이 이내 비소설을 지나 시 코너에서 멈췄다. 오래 그곳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오래 머물렀는지도 몰랐다. 읽은 시는 고작 3-4편으로 짧았는데 읽기보다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긴 대화 끝에 간신히 찾은 그와의 공통점은 독서였다. 그 사람은 북유럽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아는 북유럽 소설은 요 네스뵈 작가의 '스노우 맨' 뿐이었다. 직업도 그렇고,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시를 읽고 있다고 말하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어렵고, 난해한 사람이라는 듯 보는 시선이었다.


시에 대한 내 인상도 그랬다. 

내가 매일 보는 문서는 보고서, 기획안 등 의도가 명확한 문장이다. 한 번만 읽어도 뜻이 분명히 전달되어야 하는 글이다. 하지만 시는 다르다. 몇 번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문장이 많다. 이런 글자가 한글에 존재했는지, 어린아이가 된 낯선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이해했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저. 양보 글씨


나도 시를 읽는 내가 어색하다. 

아직도 빽빽이 채워진 텍스트가 익숙하다. 친절한 설명 속에서 답을 찾는 과정이 편하다. 그래서 행간에 여백이 많은 시를 보면 뭐라도 채우려는 듯, 억지로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 한다. 


생각해보면 책을 볼 때면 항상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이십 대 때에는 자기 계발서로 실질적인 스킬을 익혔고, 삽 십 대 초 회사를 그만두고 뒤늦은 사춘기를 앓을 때에는 에세이를 읽었다. 내 상황 같은, 내가 밤을 새우며 했던 생각과 닮은 사람들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넘쳐나는 위로들에 나는 되려 어떻게 서든 괜찮아야 한다는 부담이 들었다. 이제 그만 위로 속에 머물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어 졌다.


그래서 시를 읽는지 모르겠다. 

살아보니 인생이 눈에 보이듯 풀리지 않고, 알면 알 수록 모르겠는 것 투성이었다. 이분법으로 나누기에 여러 입장과 상황이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명확했던 것들이 더 이상 명확하지도, 그렇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모습이 시와 닮았다. 


억지로 말하지 않음으로, 홀로 더 생각하게 하는 시는 자유롭고 편안했다. 오래 산건 아니지만 획일화된 시스템 속에서 모두의 속도로 맞춰 빠르게 걷기보다 천천히 느린 듯 보여도 나만의 걸음을 걷길 바라는 마음이, 시를 읽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이 시처럼 많은 말보다 짧지만 긴 여운을 줄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읽는다.


더불어 그에게도 시를 읽으며 감동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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