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시작은 있었다.

by 양보

갑작스럽게 회사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결말을 어렴풋이 짐작 하고 있었다.

그래도 막상 퇴사 통보를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자리로 돌아와 책상을 한번 훑어보았다.

립밤 옆에 피규어들, 핸드크림, 서랍마다 놓여진 개인 물품, 읽던 책, 업무 관련 서적 ... 등

삼년이란 시간동안 이 자리는 내 방이였다. 내 삶에 한 공간, 나의 일부였다.


서랍을 열어 하나, 둘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종종 정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버릴 물건이 많았다. 하지만 떠난다니 미련없이 버려졌다.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그동안 결제 받아온 서류들이 모아져있었다.

폐기 대상과 보존해야할 대상을 구분 짓다니 보니 두툼한 파일 하나만 남았다.


이 곳으로 회사를 옮겼던 이유. 배워보고 싶었던 업무의 메뉴얼 북이었다.

이 일은 실무자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업무였기에 사실 메뉴얼 북이란게 없다.

보조자로 등록을 하면서 과장님께 하나 하나 배운걸 정리해나간 나만의 참고서 같은 노트였다.


검은 텍스트 위에는 빨간색 펜으로 설명이 적혀있고 군데 군데 노란색 형광펜 자국도 있었다.

배우고 직접 해보면서 깨달은 것들을 추가로 적어간 흔적이었다.

분노의 별표들이나 표호하는 느낌표들을 보면서 ‘맞다, 이런 시작이 있었지.’ 감회가 새로웠다.


어느덧 익숙해져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케이스들이 많아졌고

변경된 사항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놓은 엑셀 문서를 참고로 이용하면서 노트는 서랍 속에 들어가 잊혀져버렸다.


우왕좌왕 실수 남발이었던 그 시절을 노트 덕에 회상하면서 과장님과 나는 한참

우리의 첫 만남을, 시작을 이야기하며 수다 꽃을 피웠다.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했던 시작이 나도 모르는 사이 끝나가고 있었다.

평소 자기 자신한테는 야박한 사람인지라, 지난 3년간을 평가하자면 50점도 못 줄 것 같다.

오랜 벗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을 멈추라고 말해주었다. 평가는 주변에 맡기는 것이라며.


지금의 나, 흔글 씀, 양보 손글씨


사연이 있는 퇴사인지라, 회사는 조만간 다시 TO를 낼 예정이니 조금만 쉬다 만나자고 했다.

사실 반심반의다. 다만 떠나기 전 일주일간 밥을 사주겠다며 찾아와준 동료들 덕분에 호의호식을 했다.

미처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는 퇴사 후 저녁 약속을 잡았다.


내게 당황스러웠지만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고 말해준 후배,

꼭 안아주시던 과장님, 금방 다시볼 수 있길 바래주시던 실장님,

나를 가르쳐주시던 과장님은 결국 울어버리셨지만

우리의 마지막 회식은 송별회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 소리가 가득했다.

나를 향해 보여준 남아 있는 사람들의 다정함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사실 아닌척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쌓여가고 있었다.

끝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하는데,

이 나이에 새로움이란 몹시도 부담스럽기에.


하지만 마무리를 하면서 마주하게 된 나의 시작에는 열심이 묻어있었고 최선을 다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더불어 모두와 해맑게 인사하며 돌아서는데 이 마음들이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 곁에 있어 내가 더 잘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조금은 새로운 시작 앞에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마지막 근무 날

처음 시작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보았다.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 길이 끝나면, 양보 손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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