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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05. 2020

우린 저마다의 꽃이다.

스타트업(tvN, 2020)

집 앞 두 빌라 사이에 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 어떻게 저런 곳에 나무가 있을 수 있는지. 그 시작을 알 길이 없다. 아마 두 집의 지층이 달라 생긴 틈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그런 틈에서 자라는 나무는 소나무처럼 크고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봄이 되면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골목길 초입부터 진하게 풍기는 꽃냄새를 맡을 때면 엄마는 잊지 않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좋아하는 라일락이라고. 엄마 덕에 나무의 정체를 알았다.


특유의 꽃 향기가 풍기는 시기엔 작고 가녀린 나무는 모처럼 풍성히 꽃 잎을 피우고 바람에 날리 운다. 마치 나 여기 있었다고 말하듯이. 짧은 라일락 나무의 전성기가 지나면, 푸른 잎이 돋아나지만 두 집 사이에 숨어 있는 나무의 존재는 조금씩 잊힌다. 그러다 푸른 잎마저 사라지는 가을에 들어서면 갈색 벽돌로 지어진 왼쪽 집에 묻히고 겨울에는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 곳에 나무가 있는지 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곳에 라일락 나무가 있다는 걸 안다. 비록 지금 모습은 너무도 초라하지만 곧 있음 말도 안되게 황홀할 향을 풍기며 봄의 소식을 전해줄 것을 알기에, 겨울철에도 종종 그 앞에서 라일락 나무를 본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담벼락 사이에서 자라는 라일락 나무처럼,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였는지 잊는다. 달미에게 다시 한번 겨울이 찾아오자, 그녀는 예전에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준 말이 떠 올렸다.

"할머니 나 코스모스 맞아?"

그녀에게 할머니는 가을에 가장 예쁘게 피는 코스모스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봄이니 천천히 기다리면 예쁘게 필 거라며 초조해하지 말라고 했다. 당시 그녀는 불안했다. 돈 많은 새아버지를 만나 너무나 화려하게 돌아온 언니를 보자, 이번에도 정규직 채용에서 밀린 자신이 초라하게 보였다.


부모님이 이혼할 당시  언니는 엄마를, 달미는 아빠를 선택했다. 그리고 엄마가 돈 많은 새아빠랑 재혼 해 미국으로 떠나던 날, 인재는 달미에게 다시 우리가 자매가 될 수 없음을 말하던 중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달미에게 아빠를 선택한 걸 후회할 거라는 비수를 남기게 된다.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달미는 다시 만난 언니에게 자신의 선택이 틀리 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던 달미가 불안하며, 초조해하자 할머니가 달미에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준 것이다.


 꽃마다 피우는 계절이 있고, 코스모스인 너의 계절이 곧 올 거라는 할머니의 격려에 달미는 다시금 힘을 낸다. 가을에 가장 예쁘게 피기 위해,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타트업의 성지인 '샌드박스'에 지원한다. 각고의 노력과 도전 끝에 달미가 대표로 있는 삼산텍은 언니 회사를 제치고 외국 투자 회사에 선택을 받는다.  삼산텍이 개발한 서비스까지 모두 포함 30억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인수된 지 하루 만에 외국 투자 회사는 개발자 도산, 용산, 철산을 제외한 달미와 사하는 해고시키고 삼산텍을 해체시킨다. 뛰어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업 인수 후 고용을 하는, 전형적인 애크하이어에 당한 셈이다.


가을이 온 줄 알았다. 드디어 코스모스가 환히 만개할 줄 알았다. 좀 있으면 가을인데 피기도 전에 져 버리나 보다. 이렇게 지면, 내년에는 필 까? 달미의 계절은 다시 뒤로 흘러 겨울이 됐다. 그러자 그동안 자신이 열심히 해서 만든 성과마저 외면하기에 이른다. 사실 이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며, 마음이 찬 겨울바람에 한 없이 움츠러들었다. 부정적인 시선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앞으로 영영 꽃을 피울 수 없을 거라는 사망선고를 내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미는 코스모스다. 가을에 아름답게 피는 꽃. 꽃이 피지 않은 계절에도 코스모스는 코스모스다. 겨울에는 얼은 땅에서 숨죽여 에너지를 모으고, 그 힘으로 봄이 되면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온다. 여름에는 해와 바람, 비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것을 영양분으로 삼아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에 꽃을 피운다. 사람들은 만개한 꽃을 보며 이 식물이 코스모스였다는 걸 알지만, 절정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그 식물은 계속 코스모스였다.


달미는 다시 힘을 낸다. 도산의 격려를 받아 자신이 코스모스였단 사실을 기억해 낸다. 지평의 조언으로 위기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꽃은 땅을 보며 자라지 않는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 쑥쑥 자란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꽃이 만개한 순간만큼 아름답다. 지쳐 있는 지금, 자꾸만 시선이 땅으로 떨어지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지금도 우리는 저마다 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지말고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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