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너는 나의 봄> (tvN,2021)
옆 집 딸이 되고 싶은 아이가 있다.
까치발을 들어야 간신히 보이는 옆 집은 언제나 따뜻한 불이 켜져 있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옆 집 아저씨 두 손엔 딸이 좋아하는 것들로 한 가득이다.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이의 집은 매일 밤이 소란했다. 집이 엉망이 되어가는 소리가 커질수록, 아이는 방 불을 끄고 동생을 이불속에 숨겨 놓고선 창문 넘어 옆 집을 바라봤다. 옆 집 아이가 되고 싶었던 아이, 다정(서현진 분)은 이제 다른 호텔에서 욕심내는 호텔 컨시어지 매니저가 되었다. 괜찮은 어른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아직도 옛 날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깨어났을 때 엄청 혼란스러운 감정이 밀려오는 악몽이다.
작가는 묻는다. “당신의 일곱 살로부터 당신은 얼마나 멀리 도망쳐 왔나요”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너무 어릴 적이라 이제는 희미해진 일곱 살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조심스레 담고 있다. 굳이 그때의 나를 찾아가야 하나? 지금도 잘 살고 있는데? 작가가 남긴 글에 이런 말이 있다. “ 누군가의 뜻 없는 미소를 나를 향한 비웃음으로 뒤틀어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잘 지내보자고 내미는 손을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할퀴어 버리지 않으려면, 일흔이 넘어 백발이 된 머리카락으로 부모의 무덤에 찾아가서 그땐 나한테 왜 그랬냐고 울지 않으려면,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그 어린아이를 만나야 하지 않겠냐고” 내가 할퀴었던 손이 생각났다. 받아들이지 못 한 호의로 나는 꽤 외로웠으며 더딘 발걸음을 가져야 했던 시간이 있다. 우리가 그 어린아이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일지 모른다.
드라마는 조심히 메시지를 전한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에게 억지로 그날의 상처를 끄집어내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그 일을 해야 한다고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현재의 나를 격려해준다. 그 시절에 어린 너를 안아주진 못 했으나 그 시간을 이겨 내고 있는 지금의 당신을 먼저 안아준다. 그리고 그 힘으로 상처 입은 일곱 살의 당신을 안아줄 수 있게 돕는다. 드라마 속 모든 문장이 위로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 좋은 따뜻한 말로 가득할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피상적인 문장들은 반감을 일으킨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반발감 말이다.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영도(김동욱 분)도 채준, 체이슨(윤박 분)도 가영(남규리 분), 은하(김예원 분)가 달아나고 있는 일곱 살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모든 등장인물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셈이다. 자의적인가? 나는 요즘에도 잠든 엄마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되고 숨을 확인한다. 그런 밤엔 엄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살아있는 증후를 찾던 무력하기만 한 일곱 살의 나로 한순간에 돌아간다. 나는 서른일곱을 살고 있지만 생각보다 자주 일곱 살의 나를 마주한다.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시절의 일곱 살이 있는지 몰랐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일곱 살도 있고, 아직 마주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곱 살도 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겐 사소한 일이기도 하고, 일상적인 일이었을 수도 있다. 유년 시절이 아닌 성인이 되어 겪은 일도 하다. ‘일곱 살’에 대한 물리적인 시선을 거두면 그들의 이야기 속엔 당신의 이야기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상처가 자의적인 설정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영도의 내레이션이나 상담 내용, 다정과의 대화를 들으며 마치 나를 알고,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많다. 나는 이러한 반응이 결코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도 다정과 영도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당신, 그리고 나 일 테다.
작가는 ’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그 과거를 지금의 우리는 다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나를, 당신을 향한 믿음이 느껴졌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살았다고 해서 과거와 똑같은 현재를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치열하게 살아온 지금의 우리는 일곱 살의 나를 다르게 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음이 담긴 응원을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응원은 나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고 타인을 향한다. 서브 남인지 악역인지 매회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윤박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두 인물을 통해 과거의 굴레에 나는 물론 타인의 삶도 가둬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스레 ‘나’에게서 ‘우리’라고 불리는 다정한 일인칭으로 시선을 확대해 나가는 이야기의 흐름까지도 위안이고 위로다.
그렇다고 너무 정적이거나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다. 로코의 여왕 서현진 배우와 코믹 연기도 가능한 김동욱 배우의 조화가 보여주는 티카 타카 케미는 극의 무거움을 상쇄시키고, 매회 뒤통수를 때리는 윤박 님의 정체는 자칫 늘어질 수 있는 드라마를 쫀쫀하게 만들고 있다. k-드라마의 루틴에 준전문가라고 생각하는 나지만,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그런데 장르가 힐링 로맨스라니... 이 드라마의 장르에 스릴 추리라는 단어를 넣지 않은 건 영리한 연출일지도 모르겠다 :) 전작 드라마 <풍선껌>에서도 어른의 내면에 갇혀 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따뜻하게 풀어내었던 이미나 작가의 시선과 감정이 담긴 영상미를 보여주던 정지현 감독의 섬세한 연출도 위로의 서사를 거들고 있다. 절대 뻔하지 않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위로가 아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2021년 상반기 <런 온>과 함께 일곱 살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바쁜 어른 아이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다. 하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당신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