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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ug 25. 2021

망칠 것 같아 두렵지만,

<알고 있지만,>(2021, jtbc)

회사 생활에 기본이 되는 단축어를 고르라면 ctrl+c, ctrl+v, ctrl+s, ctrl+z가 아닐까 싶다. 복사하기와 붙여 넣기, 저장과 취소. 회사 생활이라고 말한 건 단지 내가 직장인이기 때문이지, 사실 컴퓨터 안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이 4개의 단축키가 적용된다. 그러니 우리 손가락 끝엔 최소 4개의 명령어가 달려있는 셈이다. 이 중에서 내가 숨 쉬듯 사용하는 건 ctrl+s(저장 키)고, 가장 다급하게 사용하는 건 ctrl+z(취소 키) 다. 만약 인생에 하나의 단축키를 설정할 수 있다면 나는 ctrl+z를 선택할 것 같다. 종전의 잘못을 바로 잡을 기회가 단축키 누르듯 간편하게 쓸 수만 있다면 로또 번호보다 탐날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crtl+z 도 만능은 아니다. 몇 단계 정도는 취소할 수 있어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다. 때로는 원하는 내용까지 되돌려주지 않을 때도 있다.  어쩌면 내가 숨 쉬듯 저장 키를 누르고, '최종'에 '최최종', '진짜 마지막 최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개의 수정본을 만드는 건, 저장과 취소가 가능하기 때문일까. 그렇게 조심에 조심을 더해서 완성한 문서는 모두, 완벽했을까?


  유나비는 제출할 작품이 완성될수록 두려움이 커졌다. 재료를 깎고 빚어서 만드는 조소 작품의 특성상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작품은 전혀 다른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비가 진짜로 두려운 건 사실 재연과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재연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되돌릴 수 없는 실수는 아닐까, 아니 그를 피해 떠나온 선택이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아니었을까 하는 두려움.


  

  사실 우리에게 이런 두려움은 일상이란 생각이 든다. 인생엔 취소 키 같은 건 없으니 매 순간 내리는 선택과 결정에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담겨 있다. 일이든, 관계든. 지금 당장은 별 문제없게 보이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나중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럴 땐 취소 키가 있다고 해도 소용없겠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보는 건 어떨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비의 이모가 한 말과 함께 생각해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만약 나비가 좋은 밭, 향기로운 꽃에서만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나비는 자유롭게 날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에 있을지, 얼마만큼 가야 만날지 모르는 좋은 밭을 향해 목숨을 걸고 날아오를 나비가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 날기를 두려워했다면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는 지금쯤 퇴화되어 다른 형태의 곤충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비는 날기를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이 내려앉은 모든 곳에서 자양분을 얻음으로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곤충이 된 게 아닐까.

  실수가 두려워 아무것도 안 했던 시절에 나는 더욱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잃은 것이 없었다고 하나, 얻는 게 없는 건 잃은 것보다 못한 일이었다. 내가 나비였고,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낸 시절이 길었다면 날개를 잃은 나비로 퇴화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실수라고 생각했던 일이 예상치 못한 멋진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유나비가 열심히 준비한 작품이 제출 직전 크게 손상되는 시련에 놓이지만, 그녀는 재연의 도움을 받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멋지게 작품을 완성한다. 유나비, 그 이름의 뜻처럼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자양분을 찾았고 멋지게 날아올랐다.

  그리고 나는 우리에게도 이런 나비의 지혜와 아름다운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나를 포함 주변을 보면,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모두 자기만의 색이 담긴 인생을 살고 있다. 힘들어서 울고, 도망도 갔었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닿는 곳에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했다. 나비가 자양분을 얻으면서 꽃가루를 옮기듯, 취소 키 같은 안전장치가 없어도 우린 (심지어) 똥밭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믿는다. 망칠 것 같아 두렵다. 하지만 완벽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그 두려움마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부디 오늘도 날아오르길. 우린 어떤 꽃을 피울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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