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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08. 2021

그 말을 미루지 않아 다행이야

철컥, 하고 문이 닫혔다.

방금 전에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사람이 언니였으니까 지금 문을 열고 나간 건 언니다. 아무 말 없이 휙 하고 나가버린 침묵 속엔 기분이 단단히 상했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보통 나보다 먼저 출근을 하는 언니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잘 다녀오겠다거나 "가나"라고 말하면 나는 "응 다녀와"식으로 답한다. 가끔 반대가 되는 상황도 있고, 보다시피 퉁명스러운 모양일지라도 서로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인사를 챙긴다. 별거 아닌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별거 아닌 말이 없으니 무언의 압박이 되었다.


그날 아침, 우린 평소와 달리 출근 준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다 내가 삐끗, 미운 모양으로 말을 했고, 언니는 뾰족한 말로 답했다. 둘 다 말의 모양에 상처를 받는 편이다. 아차 하는 순간 미운 모양으로 말이 나왔어도 다시 말의 모양을 바로잡아 괜한 말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서로 노력했다. 그래서 이런 냉랭한 아침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퇴근하면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 하면서 폭풍이 몰아치는 회사로 출근했다.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언니와 나는 다른 회사에 다녔지만 업무 성격이 같았기에 종종 서로에게 일에 대해 물어봤고, 이번 카톡도 그런 내용이겠지 짐짓 생각했다. 그렇게 쌩하고 나갔는데 별일 없다는  쇼핑몰 유알엘을 보내진 않았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일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물어본다면, 그렇게 터진 이야기의 물고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대충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언니의 문자는 미안하다는 사과였다.

아침에 있던 일은 나의 미운 말로 시작된 거니 사과를 했어도 내가 먼저 해야 했다. 솔직히 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다툼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이제까지 한두  싸운  아니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넘어가리라는 태평한 생각 했다. 하지만 언니의 정공법에 제대로   맞자 나의 비겁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민망해서 새삼스레 무슨 사과냐고 했으나 언니는 이런 분위기가 싫다며 자신도 잘한  없으니 사과를 하는  맞다고 했다. 먼저 화해를 청하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까운 가족이라서  어려운 일임을 비겁한 나는 알기에 나도 언니를 따라 사과를 했다.

 사람을 살리는  결국 그런 거예요. 내가  이야기를 들어줄게. 내가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줄게.” #너는나의봄 중에서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진부한 속담이 생각났다. 2019년 기사에 보니 1냥은 10전, 100푼의 가치였다고 하더라. 조선 시대 물가를 감안한다면 천 냥은 머슴이 143개월 동안 죽어라 모어야 하는 돈이며 2019년 기준으로 6,880만 원 정도 된다고 했다. 말 한마디에 한 사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니, 생각보다 엄청난 속담이었다.


그날 언니가 내게 먼저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면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을 테다. 내내 쓰이는 신경은 긴장이 되어 예민함을 만들고 사과할 타이밍에 또다시 이상한 말을 내뱉게 했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빠른 사과로 큰 불을 막았다. 별거 아닌 말이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런 힘이 없어 보여도 다정한 말은 마음에 붙이는 반창고가 되어 한 사람을 지켜낸다.


 먼저 사과하지 못했을까. 미운 말을 서로 주고받았더라도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던 언니에게  다녀오라고,  정도 인사는  수도 있었을 텐데. 성숙하기란 나이가 든다고 자연이 되는 일이 아닌게 분명하다. 물론  로도 우린 우스운 모양으로 여럿 싸웠다. 한번은 언니의 하소연에 맞장구가 아닌 말대답을 함으로 언니를 서운하게 했는데 사실  모든 말이 언니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었다는  결국 울면서 말했다. 언니도  마음을 알았는지 "됐어. 사과했잖아." 그렇게 말하더라(이번에도 내가 잘 못 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은 말이 많다. 때로는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할까 해서 삼킨 말들도 많다. 고맙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 네가 있어 다행이라는 말 대신 비싼 선물이나 화려한 포장으로 대신하는 일이 많아졌다. 속에 있는 말을 직접 표현하는 일이 어쩐지 부끄럽고 쑥스러워 다른 방법을 찾았다. 물론 그 또한 마음이 전해졌을 테다. 하지만 진심이 가진 순수하고 청량한 에너지는 있는 그대로 전할 때 더 큰 울림이 된다는 걸 이 기회로 또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오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말을 들었다. 그럼 오늘 해야 할 말, 다정한 말들도 내일로 마루지 말아야겠다. 때에 맞는 말은 나와 상대 모두에게 행복한 오늘을 만드는 일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많은 일이 있다면 진심을 전할 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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