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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11. 2021

깨져버린 손톱을 보며 여기까지 생각해보았다.

손톱이 또 깨졌다. 열심히 공들여 바른 시간이 무색하게 손톱이 벗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언제 깨졌는지 알 수 없었다. 출근해서 한 일이라고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펜을 쥐고 뭔가를 적으며 종이를 만진 것뿐이다. 특별한 힘을 가한 것도 없는데 곱게 칠한 매니큐어가 벗겨졌다. 군데군데 색이 사라진 손톱은 마치 이가 나간 그릇처럼 보였다.


손톱에 힘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셀프 젤 네일이 가능해지면서 매 달 두세 개씩 젤 네일을 사서 붙였다. 그냥 매니큐어보다 지속력이 좋았고, 디자인이 다양하다 보니 적은 돈으로도 샵에서 관리받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손톱도 숨을 쉬어야 한다는데 네일이 없는 손은 밋밋했다. 마치 생얼로 다니는 기분이랄까. 쉬지 않고 붙이고 떼고 또 붙이는 사이 손톱은 망가져갔다. 전용 리무버도 사고 꼼꼼하게 마무리도 했지만, 젤을 제거할 때 손톱이 뜯어지면서 바디가 많이 상했다. 바싹 말라 갈라진 저수지 같이 하얗게 깨진 손톱을 그냥 둘 수 없어 숨 돌릴 틈도 없이 덧칠을 했다. 오늘도 얇아진 손톱에 회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다 깨져버린 손톱을 마주했다. 바르지 않아도, 발라놔도 보기 흉한건 마찬가지였다. 그 안이 이미 상해져 있으니 당연한 일일터.


이가 나간 그릇 같은 손톱을 보면서, 밋밋한 손톱이 아니 금이 간 것 같은 손톱을 보이는 게 뭐 그렇게까지 창피한 일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창피했다.  이제는 생얼로는 다닐 수 있는데 맨 손톱은 아직 어렵다. 손이 못 생긴 건 아니다. 마디도 길고 손톱 바디도 길어 종종 네일 연습 손을 해준 적도 있다.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서 보여주기 싫은 부분이다.


“누군가한테는 말하기 쉬운 게 어떤 사람한테는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손톱을 보이지  하는  나의 문제다. 정말 사소한, 타인에겐 별거 아닌 일인 텐데 손톱이 엉망인  행색이 엉망인 것보다  초라한 기분이 들게 한다. 각자 그런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게 쉽다고 상대도 쉬울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깨져버린 손톱을 보며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신뢰할  있는 대상에 대해 생각했다. 오늘은 소박한 관계망 속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을 보기 위해 어여쁜 색으로 손을 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진 손톱을 보던 친구가 당분간 영양제만 바르라고 했을 , 엉망이  손톱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을 보았다. 나는 이들을 위해가 아닌 자신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공들여 색을 칠했던 건가.


나는  보여줬잖아. … 바보처럼 취한 모습도 나는 홍반장이라면 다 괜찮을 것 같은데 홍반장은 안 그래? … 알고 싶어.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우리 되는 순간을 꿈꿨는데.”


진실을, 진심을 보일 수 있는 건 타인의 강요가 아닌 오롯이 나의 선택이란 말을 들었다. 강요에 의해 발설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보나 사실에 관한 일이지 진심은 아니다. 타인의 진심을 강제로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궁금해하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니 진심을 말하는 건 오롯이 나의 선택이고 내 몫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을 꺼낼 내 용기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들어주는 이가 나의 진심을 듣고 싶어하며, 나를 사랑하는 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무너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래된 이들에게 조차 아직 어렵다. 하지만 아마 우리가 함께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들에게 여러 번 나의 가장 약하고 어둡고 처참했던 순간을 보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인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도 함께 하고 있다. 여러 번 그들에게 혼이 나고 나무람을 당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다독임을 받았다. 비난함이나 무시, 조롱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나의 진심을 듣고 싶어하고, 나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도 조금씩 욕심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힘들 때 나를 찾아와 이야기해주었으면 하는, 신뢰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누가 내 친구 아니랄까 봐 다들 힘든 건 알아서 척척척 정리하고 난 뒤에야 그랬었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것도 존중하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허락한다면 어두운 그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게 나를 초대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런데 맨 손톱 하나 보이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엉망인 손을 보았어도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다. 어쩌면 다음 만남에 좋은 영양제를 사다 주었을지도 모른다. 맨 손톱일 때 손톱도 숨을 쉰다고 했다.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오히려 단단해질 수 있게 되는, 이상하지만 다정한 순간이 있음을. 깨져버린 손톱을 보며 여기까지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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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따옴표 속 문장은 드라마 #갯마을차차차 속 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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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앞으로 ‘여기까지 생각해보았다’는 글이 자주 발행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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