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의 세포> tvN, 2021
처음 퇴사를 결심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건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당시 퇴사 이유는 힘들어서였다. 내게는 충분한 이유였으나 나의 퇴사에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문장 구조조차 갖추지 못 한 투정에 불과했다. 물론 이유는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솔직히 그들 앞에서 다 말한다는 건 상상 속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겐 그런 큰 배포가 있을 리가. 있었다면 퇴사를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과 저런 이유로 울며 겨자 먹듯,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출근을 했다. 이후 육 개월의 시간은 그들과 부모님을 이해시킬 그럴싸한 이유를 만드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 사이 나는 점점 말라갔고 이명과 현기증을 동반한 공황이 찾아왔지만, 명쾌한 이유만은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또 다른 직장이나 결혼 같은 소위 말해 '다음'이 준비되지 않은 퇴사는 바보 같은 일이라는 말만 가득했다.
결국 망가진 건강이 퇴사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내가 부족하고 나약하고 못나서 퇴사를 결정한 게 아니라고, 그런 평가만은 받고 싶지 않아 그토록 이유를 찾았던 건데, 시름시름 앓는 나는 그 상태로 이미 부족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회사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내 맘 같지 않더라. 하기사 나도 당신의 마음을 모른다. 알 것 같아도 그 정도일 뿐, 온전히 내 맘 같을 수 없다. 그러니 모두 같은 마음일 수 없고, 같은 마음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이유가 있을까. 그래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면 숨 쉬는 일조차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건강이라도 챙겨서 퇴사를 했을 텐데.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이유를 찾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퇴사를 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직서가 제출되면 한 두 번 잡을 수는 있지만 결국 수리하는 게 회사의 일이며, 조금 거창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 스스로를 향한 항변 같은 것. 뚜렷한 이유도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한 이 선택에 실은 이렇게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자신을 변호하려 했던 것 같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19쪽)"
#다가오는말들 중
명료함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형태다. 앞서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해낸 것처럼, 모든 일에 이유를 찾는 습관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다. 이유가 없는 형태를 불완전하게 여겼던 게 은유 작가님의 생각처럼 삶의 본질이 어정쩡해 그랬나 보다. 그렇다면 명쾌한, 명확한, 온전한 이유는 일평생 내게 없을지도. 나의 계획적인 면모가 실은 이런 어정쩡함 때문이었다니. 멋진 모습은 아닌데 뒤늦게 찾은 이 이유가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모든 일에 이유로 삼아도 될 정도로 막강한 이유처럼 들렸다.
퇴사 이후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에 물들었지만 무턱대고 떠난 지금, 나는 생각지도 못 한 곳으로 오게 했고 나름 잘 지내고 있다. 1년을 간신히 참은 뒤 회사를 그만두면서 스스로를 사회 부적응자는 아닌가 걱정했는데 지금 직장에서 벌써 7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그런 사이 쌓인 글이 한 권의 책이 됐다.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뚜렷하지 않은 모양의 형태였다.
정말 중요한 건 보완이 생명이듯 "어떤 중요한 사실은 머리를 거치기 전에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32쪽)" (#다정소감 중) 혹은 마음에게로 바로가 심장을 쿵쾅거림으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이유가 되는지 전해주었다.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가장 명확한 형태의 충분한 이유가 되는 일이었다. "확실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잘 몰랐지만", 명확하지 않지만 "해보니까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해 보면서 목표가 생길 수도 있"다. 뚜렷한 마음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이 성공이 아니라면 더욱더. 물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찾을 것이다. 이유를 필요해할 것이다. 다만 이제는 완벽한 이유보단 자유분방한 형태의 다양한 모양이라도 그 속에서 이유를 찾아, 발 길대로 걸어 볼 다른 차원으로 말이다.
책의 구절을 인용한 부분은 초록색, 대사는 회색 글씨로 표기해두었습니다.
* 은유,《다가오는 말들》어크로스, 2919
* 김혼비, 《다정소감》안온북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