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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08. 2021

일의 기쁨과 슬픔 사이 발란스

#일의기쁨과슬픔 (KBS, 2020)

그럼에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일의기쁨과슬픔 (장류진, 창비 출판사)


일상의 연속성이라는 걸 생각한다.

지루하고 지루한, 늘어난 테이프 같은 하루하루가 쌓여 금요일 밤을 만든다. 금요일 퇴근으로 회사를 벗어나면 약 이틀 동안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주말에게 특별한 시간적 의미를 부여하고 지난 5일간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일상과 다른 모양의 약속을 잡고 밀린 개인사를 처리하며 특별함에 힘을 실는다. 그리고 또다시 일요일 밤이 되어 자리에 누우면 출근의 무게에 짓눌려 자도 자는 것 같지 않은, 한밤 중을 헤매다 물먹은 솜이 되어 월요일을 맞는 지난주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출근러의 일상에 접어든다. 그러다 다시 겹겹이 쌓인 출근에 대한 상으로 금요일 밤을 제공받는, 큰 흐름에서 보면 일주일이 비슷비슷하게, 일상이 연속해서 흐른다.


출근러(er-출근을 전문적으로 하는듯한)의 삶에 흐르는 이 연속성이 다행이라 여긴 적도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일로 접어들지 못하고 그곳에서 모든 것이 멈춰버렸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같은 이유로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꺼억, 꺼억 소리 내어 운 적도 있다.


"근데 더 이상한 건요. 내가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날은 밝고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의 존재한 채로 출근도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억지로 출근해서 하루를 보냈는데 정말 아무것도 달리진게 없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게 너무나 이상한데, 세상은 그런 채로 돌아가고 있더라고요."  만약 내가 출근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마저도 오전의 가십 정도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회사라는 분초를 다퉈서 이상한 일이 생기니까.




그래서 지혜(강말금 분)씨가 유명 피아니스트의 국내 내한 공연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회사 대표 SNS가 아닌 자사 홈페이지에 먼저 올린 이유로 보상이 아닌 자천을 당한 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지혜 씨도 그 이야기를 듣던 안나도 웃어버리고 말았으니까. 나는 이때 지혜 씨의 15년 직장생활 구력을 느꼈다. 엄청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을 때가 아닌 이런 상황에서 구력을 느꼈다면 이상한 포인트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직장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 중 이상하지 않은 일을 찾는 게 더 힘들다. 그리고 그 일로 뒤끝을 부리는 대표가 그녀의 월급을 1년간 카드사 포인트로 지급받게 되었을 때 지혜 씨는 울었다고 했지만 나는 웃었다(지혜 씨는 카드사에서 근무한다). 비슷한 일을 겪었던 기억이 생각나서. 다만 나와 그녀가 다른 건 나는 웃는 대신 그대로 대표에게 질질 끌려다녔고, 그녀는 울었지만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꾸는 방법을 찾아냄으로 일의 기쁨과 슬픔, 그 사이의 균형을 회복했다는 점이다.



드라마 #일의기쁨과슬픔 은 장류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책은 8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고 드라마는 소설의 두 번째 이야기다. 직장인으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삶에 회사는 배경이자 사건의 발달지가 되었기에 이 소설에는 '회사 소설'이라는 새로운 분류명이 붙었다. 드라마로 따지면 '오피스 드라마'인 셈이다. 하나 특별한 게 없다. 소설이라면 의례 기대되는 긴장감 넘치는 사건의 전개나 예상치 못한 반전이나 그런 게 없다. 자신과 하나 맞지 않는 선배에게까지 청첩장을 줘야 하는지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커피값 몇 백 원 차이는 한참을 생각하면서 결국 택시를 타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곧 나였다. 그들이 보여준 엔딩은 또 어떠한가.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가 없다.(도서 <일의 기쁨과 슬픔> 해설Ι인아영)"


어차피 내일도 있을 일. 일상의 연속성으로 본다면 그렇게 특이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생각해보면 모든 게 그렇게까진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다. 그렇다고 카드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중고거래로 현금화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이 불합리한 현실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삶을 버티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관점으로 담백히 그리고 있다. 그래서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이라 느끼며 박수를 보냈다. 지혜 씨를 괴롭게 할 목적으로 부당한 방법을 택한 대표가 이 모습을 본다면 오히려 한방 먹었다고 생각할지도(그랬으면 좋겠다). 비록 첫 포인트 월급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지만 지혜 씨의 삶은 무너지지 않았다. 출근이라는 일상의 연속성을 버텨내는 직장인들의 내공을 감히 무시해서는 안된다.


덕분에 변한 게 없는 현실을 보는 엔딩이 그렇게 씁쓸하지 않았다. 애당초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는 정의를 그린 이야기도 아니었고. 책의 해설을 쓴 인아영 평론가 님의 문장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깊은 우울과 서정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신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기 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 길 줄 아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주인공들이 일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발란스를 맞추기 위해 각자 고안한 방법 중 퇴근 후 회사 생각에서 코드를 뽑는 방법은 나의 경우 직장 생활 12년 차에나 습득했다. 대표는 어떨지 몰라도 퇴근 후 회사 생각을 안 할 수 있는 건 출근러의 특권이다. 그렇게 일과 나를 분리하는 법을 익혀갔다. 일상의 연속성에서 회사와 나를 따로 떼어 놓아 나를 지키는 법을 익혀갔다.

물론 이 모든 것 행동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이상한 직장 생활에서 슬기롭게 존버 하는 일종의 정신승리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면 매 순간 승리해내고 있는 나는 또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이 센스는 타협이 아니라 응전이다.

삭막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쉽사리 생계를 포기할 수 없는 개인이 시스템을 버터 내게 하는 근력이다."

(도서 <일의 기쁨과 슬픔> 해설Ι인아영)


그렇게 저마다의 방법으로 일의 기쁨과 슬픔 속에서 발란스를 찾아간다. 이 또한 출근러의 직무란 생각도 든다. 생계를 포기하지도 않고 나를 잃지 않는 것. 오늘도 일의 기쁨과 슬픔 속을 지나는 중이다. 슬픔 쪽으로 이끄는 일에 맞서 기쁨을 잃지 않으려는 균형감각을 발휘하는 모든 출근러들을 존경하며 응원한다. 오늘도 각자 지킨 이상한 일의 세계 속에서 무탈한 퇴근을 맞길!



                             *책에서 발취한 문장은 보라색, 드라마에서 발취한 대사는 초록색으로 표기하였습니다.


드라마스페셜 <일의 기쁨과 슬픔>

제작 CP 이정미 제작 정해룡, 권계홍 연출 최상열 PD 김해정 극본 최자원

원작 장류진 출판 창비

고원희, 오민석, 강말금, 류진, 김영, 김보정 등 출연


본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웨이브 #웨이브일의기쁨과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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