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밤한대가이별에미치는영향 (kbs2, 2021)
소중히 대한다는 건 어떤 걸까.
함부로 대한다는 건 또 어떤 것이고.
‘연인’이라는 다정하고 친밀한 언어로 일컫는 사이가 곧 ‘소중히’ 여긴다는 관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대게 그렇지만 계속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에 드라마 <딱 밤 한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은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우리가 나눈 사랑에 다정함은 있는지, 확인해보라 한다.
오진(신예은 분)이 민재(강태오 분)와의 이별을 결심한 건 딱 밤 한 대 때문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진은 민재네 집에서 축구 경기를 봤다. 민재가 응원하는 팀이 먼저 오진이 응원하는 팀의 골문을 갈랐고, 민재는 자연스럽게 오진의 이마를 잡고 딱 밤을 때렸다. 점수를 잃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이 딱 밤을 맞는 건 연애 3년 차, 두 사람에겐 자연스러운 놀이이자 일상의 한 풍경이었다. 그러니 딱 밤을 맞고서 갑자기 짐을 챙겨 나가 버린 오진을 민재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별의 시작은 딱 밤 한 대일까?
드라마 속 사랑은 강렬하고 운명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는 사랑은 가랑비에 젖는 옷을 닮았다. 자주 만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래서일까. 이별은 전쟁과 같은 난폭한 사건이 있어야만 생기는 일로 여긴다. 사랑은 위대하니 그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이 끊어질 일 없다고 생각하는 믿음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별의 이유가 사랑에 빠진 이유와 비슷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이별도 가랑비에 옷 젖듯 시작된다.
“우리가 뭐 하루 이틀 그렇게 지냈어?”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 이틀 그렇게 지낸 게 아니더라.” 그녀도 인정했다.
나는 이런 두 사람의 대화가 무한 반복되어 들렸다. 사실 두 문장만 되풀이해도 대화는 이어진다. 답이 없는 말, 한쪽이 끝내기 전까지 끝도 없이 되풀이될 수 있는 수평선 같은 대화.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라면 멋지겠지만 결코 한 점에 다다를 수 없는, 두 사람의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화였다.
민재와 3년간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나누었지만 연애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오진이 느낀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함께 있으나 외로웠다. 딱 밤을 맞은 그날만 해도 그랬다. 약속 시간보다 늦은 오진에게 민재는 왜 늦었는지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오진을 향해 입을 맞췄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오진이 뒤늦게 민재의 물음에 답을 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민재는 오진의 이야기를 듣지 않은 채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것도 혼자, 서둘러 말이다. 사실 오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인’이라고 해서 두 사람이 나누는 행동이 무조건 사랑을 담은 행동이 아님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배려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 우린 더 이상 ‘연인’ 이 아니라는 현실을 말이다.
오진이 민재의 여자 친구며, 두 사람이 사랑하는 연인관계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그 관계를 유지하기위해 필요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그에겐 없었다. 비 오는 날 작은 우산에 서로의 어깨가 젖는 걸 걱정하기보다 우산을 하나만 샀다고 불평하던 그에게는, 음식을 정할 때나 음료를 시킬 때조차 의사를 묻지 않던 그에게는, 식당에서 물이나 수저, 앉을자리를 먼저 챙겨준 적 없던 그에게는 관계의 모양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었다. 안다, 유치한 이유라는 걸.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이라는 걸. 고작 그런 행동들로 인해 사랑이 아니라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랑은 본디 유치하다. 유치한 만큼 찬란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작고 사소한 일조차 챙겨주기 원하며 무엇보다 아프게 하기 싫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그 오글거리는 말이 진심인 순간이 사랑하는 순간이다. 하나 오진의 이마는 매번 민재가 때리는 딱 밤에 붉게 부풀어 올랐다. 민재가 때린 건 오진의 이마였겠지만, 오진이 맞은 건 마음이었다. 오진의 옷이 소리 없이 내리던 가랑비에 전부 젖어버렸다. 그래서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외로워서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외로워서 이 사랑을 그만둬야 한다는 지금의 상황이 괴롭고, “헤어지려면 누구 하나의 바닥을 봐야 하는”게 무서웠지만 “그게 무서워서 이별을 미루는 바보” 짓을 그만하기로 한다.
나는 둘이어도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랑하는 연인의 어떠함과 무관한, 인간 본연이 가지는 존재적 외로움에 가까운 감정으로 이러한 외로움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시간에는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건 사랑하고 있다 느낄 때의 이야기다. 작가는 ‘사랑한다면서 거짓이 난무하고, 무시당하고, 외면받고, 외로우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어긋난 행동과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물었고 그에 대해 민재와 원빈(홍경 분)을 통해 보여준다. 딱 밤 한대로 이별을 결심했다고 인정한 오진처럼 드라마도 꾸미거나 애써 포장함이 없다. 솔직하게, 원초적인 외로움에 대해서는 민재를 통해 말했다면, ‘소중히 대한다’는게 어떤 모양인지는 오진의 작은 상처조차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원빈을 통해 보여준다. 민재는 헤어짐의 이유를 원빈으로 삼았다. 갑자기 다른 남자가 등장하니 오진이 흔들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전개다. 하지만 오진의 옷을 적신 소리없는 이별의 빗줄기가 무엇인지 원인을 찾는 노력은 다른 곳이 아닌 두 사람의 지난 시간 속에서 찾는 것이 옳다. 작가는 오진을 통해 내내 말해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누군가 나를 함부로 여기고 있지 않은지, 내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고. 그렇게 돌아본 모습이 정말로 ‘함부로’라면 밑바닥을 보는 걸 무서워하지 말고 이별을 고하라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깨닫는 방법 중 하나는 가짜가 아닌 진짜를 만났을 때고, 원빈은 진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연인이라는 관계 속에 안심하는 사이 소중함을 잃고 무너져가고 있었다. 서로를 조금 더 소중히 대하려는 노력은 사랑할 수록 필요하다. 그것이 힘들어지면 이별인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재처럼 오진이 새로운 사람이 생겨 이별을 결심하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 《 19호실로 간다(도리스 레닝, 문예출판사) 》를 읽어보길 권한다).
책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서 김정운 작가는 외로움에 대해 ‘존재의 본질’이라 말한다.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존재’ 임을 깨닫는 것뿐.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서워 외로운 시간을 피하려고’할 때 오히려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연애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곳에 머물기보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울 것’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진의 이별은 꽤나 용기 있는 결단이다.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단막극은 지금 나는 소중히 여겨지고 있는지, 소중히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연인’이라는 다정한 말이 반드시 다정한 관계의 모습을 보장하지 않는다. 소중히 여기는 노력 가운데 여물어가는 것이 사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만 그 자리에 이별을 고하자. 오진처럼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보자. 무엇보다 외로움은 혼자여도 둘이어도 있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니 당신은 누군가로 인해 괜찮은 존재가 아닌, 혼자여도 괜찮고, 둘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소중함에 대해 일깨워 주는 <딱 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 웨이브에서 관람 가능!
+ 김정운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21세기 북스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기획의도를 인용한 부분과 책을 인용한 부분은 초록색으로, 드라마 대사는 파란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드라마스페셜 2021 <딱 밤 한 대가 이별에 미치는 영향>
제작 구성준 극본 김미경
신예은, 강태오, 홍경, 하윤경, 서이숙, 이가연 출연
본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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