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네임 2022, 넷플릭스
작년에 본 <낙원의 밤> (2021, 넷플릭스, 리뷰 바로가기)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나는 누아르 장르를 좋아한다. 누아르란 ‘검은’이란 의미의 프랑스어다. 범죄와 폭력이 주가 되어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담고 있다. 그렇다 보니 강도 높은 액션 장면이 대거 등장하지만 액션물이라고 하지 않는 건 누아르가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최근 리뷰에서도 자주 말하고 있었지만 찐-한 누아르 물이 보고 싶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누아르 물을 많이 본건 아니다. 사실 잘 모른다. 내게 누아르는 영화 <무간도> 일 뿐이다. ‘어둔’, 누아르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은 <무간도>는 추억 속 기억 끝자락에서 아직도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넷플릭스 <마이 네임>에서 그 향기를 다시 맡은 듯하다.
영화 <무간도>의 중요한 장치였던 ‘언더커버’ 설정은 <마이네임>에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지우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아버지가 몸 담았던 동천파에 들어가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고 경찰에 잠입하게 되면서 언더커버로 활동한다. 그러면서 마주하는 냉혹한 진실과 복수를 그리고 있다(네이버 기본정보 인용).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봤다면 기본정보에서 이미 어떤 부분이 반전으로 등장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이네임>은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 익숙한 클리셰를 많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판에 박힌 진부한 느낌을 주지 않는 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지 못 하게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특히 한소희 배우의 액션은 <마이네임>이 오픈되기 전부터 화제였는데, 정말이지 보는 순간 매료된다. 건장한 남자 조직원들과의 싸움에서 그녀는 어떠한 특혜도 받지 않는다. 그들과 똑같이 싸운다. 카메라마저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는다. 2화에 등장하는 동천파 행동팀 간의 시합은 단 한 사람, 최종 승자를 가려질 때까지 진행되는데 작은 경기장 안에 가득한 조직원들 틈에 처음에 지우는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씩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서 남아 있는 지우를 보았을 때 당연히 그녀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럼 그렇지'가 아닌 '그래 그렇지!'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를 특별하게 담지 않음으로 한소희 배우의 액션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감동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이런 상상 속에서 더 커진다. 실제로 그녀는 모든 액션을 직접 수행했다. 칼이 무기로 사용되긴 하지만 <마이네임> 속 액션은 몸과 몸으로 만들어진다. 온 몸으로 소화하는 한소희 배우의 액션은 우리로 하여금 누아르 분위기에 완벽하게 몰입하도록 설득을 시켰다.
연출을 맡은 김진민 감독은 “자극적인 걸로 뭔가 이뤄내야겠다고 전혀 생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전체적인 밸런스를 고려했다”면서 “장면들이 어떤 느낌으로 남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런 고민들이 있었기에 폭력적인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있는 <마이네임>에서 기억에 남는 건 그런 자극적인 장면이 아닌 쓸쓸한 감정과 캐릭터들이었나 보다. 클리세로 서사를 쌓았다는게 이유가 되어 이 작품을 소홀해 대하면 안 될 이유다. 이미 답을 아는 퍼즐 조각이라도 그 피스가 수 천 개, 수 만개라면 정교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조각을 맞춰나가는 광경은 꽤나 장엄하게 느껴진다. 장면에서, 캐릭터에서 고민한 흔적이 넘치게 보인다(감독 인터뷰 바로가기 1, 감독 인터뷰 바로가기2).
누아르 장르가 제대로 빛을 내려면 잔혹한 악역이 필요하다. 악역이 흐리멍덩해서는 절대 누아르가 가진 '어둔' 분위기를 만들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동천파 두목, 무진을 연기한 박희순 배우는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심지어 나의 누아르 사전에 <무간도> 다음으로 <무진>이 기록될 만큼, 그는 누아르에 딱 맞는 악역이었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마이네임> OST를 올리지 몇 통의 DM이 왔다. 열광적인 무진의 팬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무진을 동정하지 않는다. 지우의 인생을 볼 때 그는 참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보인 압도적인 분위기는 인정이다. 그에게서 느낀 잔인함은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고급스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흐르는 냉기가 있다. 사람을 잔인하게 죽여서 그를 잔인하다 말하는 게 아니다. 그의 잔인함은 주저하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에 있다. 잔인한, 포식작의 강렬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명실상부 누아르에 최적화된 빌런이란 느낌이 확 왔다.
감독의 인터뷰에 재미난 내용이 있었다. 감독은 무진을 "지금까지 나온 나쁜 놈 중 제일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진을 연기한 박희순 배우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캐릭터에 동화되어 매 소딕 한 연기를 보여"주었기에 "정체성이 제일 잘 확립된 캐릭터"가 되었고, 그렇기에 입체적인 느낌을 보는 이들에게 전했던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예정대로, 익숙한 흐름대로 이야기가 흘러감에도 우리가 <마이네임>을 즐기며 n 회차 감상까지 달리는 건 이런 캐릭터들의 힘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지우를 드라마에서 봤다면 그녀가 무진이 아닌 좋은 어른, 이를테면 <나의 아저씨>의 동훈 같은 어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안타까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불쌍하게 보길 지우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드라마를 보며 어떠한 의미를 찾는데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이들을 담은 카메라의 시선이 그토록 무심했기 때문이라 생각됐다. 그리고 그 무심함이 차가운 잔인함을 만들었고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을 남겼다. 동정할 수 없는 이들의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쓸쓸함이다.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는 누아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독특한 차가운 감정은 행복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상한 해방감을 준다. 때론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지칠 때가 있다. 곱고 고운 감정을 강요하는 내게 누아르는 일종의 일탈 일지 모르겠다. 이래서 내가 누아르를 좋아하나 보다.
<마이네임>, 제목이 말하고 있듯 어떤 이름으로 불려질 것인가는 곧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가 얼굴에 남듯이. 지우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이름은 '지우'였다. '무진'이 지우가 자신을 죽이러 오길 바랬던 건 그에게 남을 이름이 '동천파 보스'였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마이네임> OST를 듣고 있다. 장면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OST가 한몫했다는 건 보는 모든 이가 공감하는 사실이다.
차가운 오늘의 날씨와 OST가 쓸쓸한 공기를 만든다. 조만간 한번 더 볼 생각이다. 주변에 <마이네임>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정말이지 없더라. 나는 저들이 선택한 마지막 이름을 알기에 다시 본다면 다른 감정들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변함 없으리라. 여전히, 쓸쓸할 것을 알기에, 복잡한 살이 중에 이 감정이 그리워지면 이젠 <무간도>가 아닌 <마이네임>을 볼 것 같다. <마이네임>의 이름은 ‘누아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