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 for the right of way through the way of right
That's right 수많은 땀 시련의 삶 눈물의 강
잃어감이 더 많았던 시간에 묻던 질문의 답 (내 해답)
Everything's gonna be alright
I'm Okay 긴 밤 지켜내 My life
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
It's so hard to say goodbye to yesterday
(~I remenber back in the day 뒷모습을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I remenber back in the day 절대 변치 않는 채로 끊임없이 살아가길)
에픽하이의 노래‹Yesterday› 가사
그림 그리는 사람을 좋아했다. 풍경화를 좋아했다. 많은 색의 변화를 인지하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화가의 눈에 보이는 다양한 색감에 내 눈이 같이 매료되고 싶기도 했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그려진 그림을 볼 때면 종종 생각했다. 저 다채롭고 적확하게 그려진 그림만큼을 나는 왜 시로 바꾸지 못할까. 아름다운 색채만큼의 단어와 은유의 조합을 왜 나는 쓸 수 없을까. 화가 나기도 했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
나도 한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었다. 중학생 때는 내가 하고 싶었던 셋을 다 했다. 글을 썼고 풍경화를 그렸고 하고 싶었던 과학탐구로 글라이더를 반복해 만들고 대회에서 날리며 상을 탔다.
어머니의 학창 시절이 담긴 흑백사진을 볼 때나 아버지의 군인 시절이 담긴 흑백사진을 볼 때도 같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림을 볼 때만큼이나 사진 속에서 추억이 색채들과 어울려 아름답게 보일 때마다 나는 무력해졌다. (무력해진다는 말을 이번에는 자주 쓰고 싶다.)
예술대학교에서 서양화과와 동양화과의 전시회를 매년 돌아볼 때, 샤갈의 전시회를 돌아볼 때도 몇 작품 앞에서 나는 무력해졌다.
그림이나 색채 앞에서 무력해지는 일은 내가 시 앞에 설 때와 비슷해진다. 고심 끝에 표현한 단어와 문장 안에 내 마음과 생각이 정확하게 들어갔다고 느낄 때 나는 힘을 잃는다. 그림 한 점 앞에서 생각이 마비될 때, 색채 앞에서 생각이 마비될 때 나는 힘을 잃는다. 내 주변 내 일상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느낌들로도 뒤섞인다.
그래서 중독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책을 즐겨 읽고 시를 쓰고 문학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림을 찾아보려 하는 일도 종종 그렇다. 색채에 중독된 사람처럼, 아우라를 풍기는 그림들에 기꺼이 시선을 바치곤 한다.
그림 얘기를 하게 된 건 어쩌면 내가 느낀 처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나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한 건 그림이었다. 사진보다도 더 깊은 시선으로, 문학보다도 더 직관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내 추억을 그 상황으로 돌려놓고 몰입하게 만든 것은 그림이었다. 수업 때 친구가 그린 그림으로 그리고 내가 그린 그림으로 나는 그렇게 느낀 순간들이 있었기에.
갱신이기도 했고 자각이기도 했다. 그런 중학생 시기부터 나는 어떤 강박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한숨은 쉬어도 내 꿈은 쉬지 못해> 같은 에픽하이의 노래 가사나, "손이 많아 꿈을 쥐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꿈이 많아 손을 쉬지 못하는 사람이고 싶다."라는 타블로의 말에서 나는 나를 계속해서 자각하고 갱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대학생 시절의 어떤 기간에는 매 순간 긴장을 하고 살았다. 술에 취해 집에 갈 때도, 쓰러져 누워 자면서도. 새벽에 깨어나 창 밖을 보면 나보다 일찍 일어나 긴장하며 사는 사람들이 보였다. 가령 나는, 그 사람들 머리 위에 비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면 그들은 더 바쁘게 움직일까 아니면 잠시 어디에서라도 멈춰 서 있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긴장에 빠져들곤 했다.
종종 우울했고 종종 힘을 얻었다. 종종 힘을 잃기도 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어서 많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참기도 했다. 소리 내어 울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쉽게 눈물이 맺혔다. 쉽게 눈물이 났고 참다가 참다가 한 번에 울고 싶기도 했다. 여전히 마음은 그대로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좋은 사람인지. 이런 채찍질이 없으면 사람도 무섭고 생활이 무섭고 나를 견디지 못할 것도 같은 마음. 잘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도 혼자 술을 마시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검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었다. 난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사람이 되어버릴지, 어떤 사람으로 변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날은 많았고 그렇지 않은 날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죄책감을 오가며 검은 자세로 잠들었다.
우주에 가면 별들이 더 잘 보이겠지, 우주를 떠돌며 별들을 보다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별과 달 하늘에 더 집착해가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밝은 하늘을 보다, 밝은 하늘 아래를 살다 검게 변한 하늘, 그 하늘에서 빛나는 밝은 별과 달을 본다는 것이 내게는 방향을 생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림을 보는 일처럼,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는 일처럼,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깊어질 때마다 견디고 있다 괜찮아졌다 믿었다. 그렇게 지나갔던 시간도 모두 좋았다. 충분히 기억하고 충분히 그리워하면서 종종 울고 자주 생각에 빠지는 일
시간을 견디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가 울고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땅만 보며 걷고 걷기를 계속해야만 하는 내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끝에선 기어코 죽어서 녹이 슨 철의 색깔처럼 번져갈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하지 않고 혹은 생각하면서도 내가 나를 견뎌보자는 생각
하늘로 쏘아졌거나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는 것들이 밤새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질병처럼 앓아누운 심장이 검게 터진 채 창밖을 물들이는 것 같은 날이 있다.
그 바람대로 삶을 살다가도 언제든 나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I remenber back in the day 뒷모습을 생각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I remenber back in the day 절대 변치 않는 채로 끊임없이 살아가길> - 에픽하이의 노래‹Yesterday› 후반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