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로 문학하기 «집 번호를 준다는 것»(Feat. 린)
피렌체의 두오모는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좋다고 옮겨 쓴 마음의 각고에는
미래의 아내와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할 수는 있을까)
마음이 생겼다, 좋게 읽은 시를 모아
아내와 아이에게 읽어주는,
이런 생각을 하면 술에 취했어도 연필은 잘 깎였고
긴 시를 옮겨 적어도 손가락이
아프지 않았다
-월간 웹진 «님(Nim)» 2024년 5월호에 발표한 시 <필사 노트>의 일부.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며 그 진짜 삶이 과연 나를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 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거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한강, <어둠의 사육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