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선 Aug 19. 2024

에픽하이로 문학하기

High Skool Society

부끄럽게도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죄처럼 여긴 적도 있고 베개가 젖도록 운 적도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선 혼자 술 한 잔을 하고선, 내 대代까지는 희생을 해야겠다는 말을 가볍게 주절거린 적도 많았다. 희생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하고 싶은 건 글을 쓰는 일이었고 문학을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문학을 포기한다는 건, 먹고사는 일을 먼저 챙기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타일공이 되거나 고향에 남은 친구 몇처럼 공장에 다니고 생계를 먼저 챙기는 사람. 가족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꿈보다 돈의 무게가 더 중요시되는 일이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겁게 느껴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는 것이 아닌, 못하는 것의 좌절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까 봐. 문학을 하는 건 내 마음을 붙잡는 최선의 다짐이기도 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라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하려면, 얼마나 부끄럽지 않아야 할까. 가진 돈의 무게가 부끄러움의 무게가 되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서른이 넘었다. 지금은 시인이 되었고 별개로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이제는 어느 것이 본업인지, 시인이 먼저인지 직장이 먼저인지 나를 소개하는 일이 애매하기도 하다.


중학생 때부터 "남자는 몸 대신 사상을 키워"라는 말을 신념 삼았다. 2004년 발매된 에픽하이의 2집 앨범 "High Society"에 수록된 "평화의 날"이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분이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체질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아 놀림을 많이 받았고, 줄곧 병치레가 많고 허약한 체질이었던 나에겐, 저 가사가 나를 정당화하기에 딱 좋은 말이었다. 툭하면 싸우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때리고, 허세를 부리는 친구 몇보다 결국은 사상이 승리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나는 책을 읽고 배워 마음을 키우고 사상을 키우겠다고.


이때부터 내 롤모델은 에픽하이였고 타블로였다. 친한 친구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에픽하이의 노래와 가사들은 성장기 내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과장하면 에픽하이의 노래 가사들을 밥처럼 생각했고 타블로의 말을 법처럼 여겼다.


고집하고 간직하는 꿈에는 무거운 책임감과 고민, 걱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언제나 숙제처럼 안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인 2008년, 타블로는 MBC FM라디오에서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를 시작한다. 밤 10시에서 12시까지 진행되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첫 방송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도저히 꿈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꿈'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은 것을 상징하는 단어이고

어떻게 보면 많은 분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단어이자, 어떤 분들에게는 손에 담을 수 없는

상징적인 단어일 때도 많은데,

제가 사실, 중학교 때부터 굉장히 친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미술을 매우 잘했어요. 그림도 굉장히 잘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화가가 되고 싶어 했고, 그 누구보다도 가능성이 있는 친구였는데,

대학교를 들어가면서 자기가 그림을 더 이상 안 그리고,

과를 바꾸면서, 제가 "아 너 왜 그러냐. 그림 계속 그려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도

그런 말들은 귀에 들을 수 없는 그런 현실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주변에서 요구하는 그런 현실에 부딪혀서,

"나는, 내 꿈은, 조금 있다가 이뤄도 될 것 같아"라고 친구가 얘기했어요.

그러면서 "일단, 돈도 벌고, 좋은 직장 구하고, 그런 다음에 꿈을 이루면 되지."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 이후로 다 크고 나서 그 친구를 만나니까, 그 친구가 성공은 했어요 다행히도.

그런 선택을 해서, 정말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집에 놀러 갔더니 굉장히 많은 그림들을 사놓았더라고요.

거액의 그림들을 사서 벽에 붙여놓고, 밤에 그 그림들을 자랑하는 친구의 눈빛을 바라봤는데

그때 친구의 눈빛에서 제가 봤던 건,

'한 때는 내가 저런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는데...'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제가 생각했던 걸, 오늘 여러분들에게 얘기해드리고 싶은데,

전,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난, 손이 가득해 꿈을 쥐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꿈이 가득해 손을 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여러분도, 자신의 꿈이 뭔지 생각하시고요. 절대 양보하지 마시고,

그리고 미루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2008.04.07.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



타블로의 라디오 첫 클로징 멘트였던 "난 손이 가득해 꿈을 쥐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꿈이 가득해 손을 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말은, 꿈을 고민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학생의 나한텐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고집이 될 만큼이었고 아집이 되어도 좋았다. 물론 그 당시엔 아집이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말이다.


여담이지만, 2010년 한창 타블로의 학력위조 논란이 일었을 때, MBC 스페셜에서는 타블로와 함께 스탠퍼드 대학교에 가서 취재한 것을 방영한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방송을 본 직후 학교에서 나와 친한 친구들 몇은 방송을 봤냐며 방송사의 기획력과 구성을 비롯해서 이슈에 대해 한참을 심각하게 얘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때 그 방송에서 나온, 스탠퍼드 대학교의 돌바닥을 걸으며 타블로가 읽었던 문구를 기억한다.

"절망하는 사람들한테는 희망을, 외로운 사람들은 사랑을, 그리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가끔 이 말을 안고 잠들었다. 그러다가 한동안 잊고 살았고, 잊고 사는 동안 글을 썼다. 최근에 와서 다시 저 문구들을 찾아 읽었는데,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닌가 하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시를, 글을 쓰려는 나와, 직장을 다니고 있는 내가 너무 많은 짐을 지려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튼, 시간을 거슬러 13년 전 고3 때. 친구 한 명이 내게 에픽하이의 앨범을 줬다. 그때도 나는 에픽하이의 노래와 가사를 찬양하고 있었고. 그 친구도 에픽하이의 노래를 좋아해 반가워하면서 같이 자주 얘기를 나눴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앨범을 내게 선물해 준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나긴 했는데. 1학년 때부터 다른 반이었던 그 친구와 친해지게 된 건 내 이름 때문이었다. 기선제압이라는 말을 여태껏 많이 듣고 지냈는데, 그 친구만큼은 어떤 부분이 독특해선지 기선제압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상기선, 직선기선이라는 말을 수업 시간 때 배웠다며 그렇게 내 이름을 기억했다고 말해줬다.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우리는 셋이서 많이도 얘기를 나눴다. 장난도 치고 철학과 문학, 신문기사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고 에픽하이 얘기도. 지금은 연락이 끊긴 그 친구들은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집에 와 앨범에 담긴 노래들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꿈을 이뤘을까. 글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회사를 다니고 있을까.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상상하고 그러면서 듣던 노래였는데. 이제는 정말로 10년은 더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글을 쓰는 꿈을 이뤘다.


또 생각하게 된다.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될지.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겁보다 상상할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반대로 되어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나기보다 겁과 불안함을 먼저 상상할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은 더 낮아진다.


그래도 살아야지. 이겨내야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이 듣고 싶은 에픽하이 노래♪

에픽하이 2집 «High Society»(2004.07.26.)중에서 ‹평화의 

(작사: 타블로, 미쓰라진 / 작곡:타블로)

https://youtu.be/xOALAXrPr6E?si=jROeEDm8nnLkJZ4w


에픽하이 1집 «Map of the Human Soul»(2003.10.24.)중에서 

‹10년 뒤에(Dear Me) (Feat. Leeds)

(작사: DJ투컷, 타블로, 미쓰라진 / 작곡:J-Win)

https://youtu.be/DfmzkZ89o4E?si=JVl-D3u718p1o9m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