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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Jan 10. 2022

Andante e Cantabile

통각

 디지털 피아노를 쓸 때는 몰랐죠.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근육통이 생겼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디. 손목은 그나마 낫지만, 팔은 물론이요 복근 운동 한 마냥 배도 당깁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죠. 자세가 이상한가요?



 "아, 그 통증이요. 저도 느껴요. 피아노를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계속 느낄 거예요. 오늘도 열심히 연습했구나 하고 그냥 익숙해지세요."



 하시곤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죠. 운동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근육이 당기는 기분이 들어야 운동 제대로 했다 느끼신다더니, 새삼 음대를 목표로 삼았을 때 '음대는 체대'라시며 농담 삼아하신 말씀 실감 납니다.



  많은 통증 가운데 고통이라 불리는 감각은 예술하는 사람에겐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하죠. 서편제에서 나오는 아비는 딸자식 좋은 소리 만들겠다며 눈까지 멀게 하고, 예술을 위해 귀를 잘랐다는 고흐도 있으니(이게 참인지는 의심스럽지만요) 예술과 고통의 관계는 애증인 듯합니다.



 고통을 필요로 하는 일이 비단 예술뿐일까요? 공부를 하기 위해 잠을 참아내고 인내하는 고통도, 기술을 익히기 위해 손에 몇 번이고 터지는 물집과 상처의 고통, 신을 기리는 성직자조차도 외로움과 내면의 고뇌라는 고통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이 하는 모든 것에는 고통을 수반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이 통증 느끼고 싶지 않다고 피하면 어떻게 될까요? 통증이 없는 삶. 행복할까요?



 약 부작용으로 몸이 마비됐습니다. 혀도 굳었고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죠. 다리도 움직이지 않고, 손은 무엇하나 제대로 잡질 못했습니다. 씹는 것도, 침을 넘기는 것도 어려웠던 시간. 정신만은 온전하게 깨어있었습니다.



 몸이 마비되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의외로 마비의 이유를 찾지 못함도 아니었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이유들도 두려움의 이유지만, 그중 최고의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감각입니다.



  시간이 지나 몸의 마비는 풀렸지만 아직도 그 시절의 것들이 남았습니다. 차선이 휘어져 보이거나 평지를 걸어도 언덕을 걷는 기분. 평지에서도 중심잡기가 어렵죠. 자주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그런 후유증이 아닙니다. 제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아픔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22살부터 28살까지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이 없습니다. 마치 그 시간이 사라진 듯합니다. 장난스럽게 '난 맥박이 안 뛰나 봐! 좀비인가?' 하면서 농담을 했지만, 혼자 남은 밤에 귀를 막고 심장소리를 들어보려 해도 손으로 심장 위를 눌러도 통 느껴지질 않습니다. 살아있나요? 여기는 현실일까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30대에 접어들어, 심리상담도, 정신과에서도 저를 포기하며 심리학을 배울 것을 권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상담도 꾸준히 받았죠. 



 "너는 감정을 어떻게 느끼니?"


 "사실 지금은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요. 고요해요. 이게 평안이라면 평안이겠지만, 그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어요."


 "네 느낌에 이름을 붙여봐."


 "없어요. 없다는 게 이름이에요."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어떤 말이든 좋다. 떠오르는 아무 말을 해보렴."


 "음, 저는 살아있나요? 제 귀엔 제 심장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완전히 비워진 것 같아요. 껍질만 남았나 봐요. 눈물은 흘러도 심장이 뛰지 않아요. 소리가 사라졌어요. 내 눈물이 진짜이긴 할까요? 웃음이 나일까요? 그저 아무렇지 않다는 게 내 전부예요. 거울 속 내 모습은 너무 낯설죠. 왜 이렇게 뚱뚱해졌죠? 이 모습이 내가 맞나요? 나는 내가 너무 낯설고 무서워요. 그런데 전 이 불행을 남 탓할 수 없어요. 내가 바랬거든요. 제게 너무 무서운 일이 있었어요. 그날의 기억도 감각도 다 사라지길 바랬어요. 아픔도 무서움도, 나에게 벌어진 모든 나쁜 일들이 잊히고 무감각해지길 매일 기도했어요.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병을 얻었죠. 오랜 입원 생활, 죽음의 문턱에서 나왔을 때, 감각이 없는 거예요. 기쁨? 그런 느낌도 없이 그냥 감각이 사라진 것만 알았고 걸신들린 듯 밥만 먹었죠. 그런데, 무서운 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몸의 감각은 돌아오는데 마음과 심장은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질 않아요. 아무것도. 영혼이 껍질만 두고 나가버린 것 같아요.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 제 존재를 의심해요. 내가 내가 맞는지. 살아있나? 여기가 현실인지, 지옥인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듣고 계신 분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저보다 더 아파해주셨죠. 왜 아파하실까 싶을 정도로 말이에요.



 "사람에게 감각이란 좋은 친구지. 배고픔. 배부름. 눈의 움직임. 손의 자극. 사람과 사람이 닿을 때 느낌. 감정의 흐름에 따라 느껴지는 신체의 신호들.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통각이야. 내가 뭐가 필요한지, 어떤 게 과도한지. 어디가 나빠지고 있는지, 내 구석구석 감각들을 느끼고 찾는 활동은 정말 중요한 일이야. 사람들은 때때로 귀찮다는 이유로 희로애락을 느끼고 싶지 않다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게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렵단다."



 "지금의 전 인형이에요. 생글생글 적당히 웃고만 있으면 사람들은 제 문제를 모르죠. 예전에도 이렇게 살았지만, 그땐 그래도 심장아팠고, 묵직하게 누르는 통증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강해졌나 봐요. 좋아진 거겠죠? 어른이 된 걸까요? 성장해서 그런 걸까요? 제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아니. 어른이라고 아프지 않은 게 아니야. 그 통증의 이름을 알고 잘 이겨내는 법을 아는 게 어른이지. 넌 그냥 멈춘 거야. 네 시간이 멈춘 거다. 이것을 강해져서라고 착각해선 안돼.  상황이 영원할지 영원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삶이 영원하지 않기를 바란다. 난 네가 겪고 있는 마비가 네 마음에서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아픔을 견딜 수 없어서 네 시간을 멈췄고, 결국 그 시간을 되돌릴 힘도 네게 있단다. 어떤 사건이 네 심장을 다시 깨울까? 어떤 일이 네 시간을 다시 돌아가게 할까?  네가 할 노력은 그걸 찾는 거야. 심장이 뛴다는 통각을 어떻게 찾게 될까? 네 삶의 과제는 이 통증을 다시 찾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최선을 다해 찾아보면 좋겠구나."



 상담이 끝나도 제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년 이상을 이렇게 지내니 익숙해졌고, 냉소적으로 보이긴 해도 사람들에게 제 문제를 들키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죠. 심장이 뛴다는 통증. 그게 뭐가 그리 대수일까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요? 그저 차갑게 굳어버린 심장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어쩌면 이 세상 살아가기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제게 더는 상처 주지 않습니다. 피상적인 관계. 사람이 뭐가 소중한가요? 사랑을 모르고, 남의 감정에 공감을 못하는 게 무슨 그렇게 큰일인가요? 모두 그렇게 살아가죠. 단지 제가 나라는 사람을 모를 뿐. 나를 잃었을 뿐. 그뿐이죠. 사람들은 이런 제 모습을 좋아하죠. 단단해 보이고 강해 보이는 나. 그저 이런 나를 어색해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오로지 나 하나.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살아있나요? 아직도 전 꿈을 꾸는 중일까요? 나는, 나는 누구인가요?

 


 주변을 정리하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저 몸에 집중합니다. 작게 울리는 소리. 존재하는 순간부터 함께한 감각. 엄마의 감각에서  것이 된 익숙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익숙해져서 혹은 외면해서 때때로 잊고 살지만, 그 통증은 를 살게 하고, 저를 인간답게 하고, 저를 증명하고 있죠. 심장이 멈추면 저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통증이 가득한 삶. 그 통증의 이름은 다양하죠. 그 안엔 행복도 사랑도 기쁨도 환희도 있어요. 하지만 통증이라는 말은 언제나 아픔만 존재한다 생각하죠. 하지만 사실 통증은 제가 지금 느끼는 모든 것이죠. 지금 느껴지는 손끝의 감각. 심장이 움직이는 진동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지금 느껴지는 통증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떤 것이 부족하다 말하죠? 혹은 너무 과하다 말하고 있을까요? 통증은 저성장시키는 엄격하고 상냥하며 솔직한 좋은 멘토입니다.



 마음이 허하고 무료한 날이면 저는 향을 태우고 조용히 제 감각에 집중해봅니다. 여러 가지 감각이 들려옵니다. 때로는 무섭고 추하기도 하죠. 하지만 거부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어들어 침묵하면서 감각을 무디게 할 뿐이죠. 그냥 그땐 인정합니다. 내게 이런 통증이 있구나 하고 말이죠.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죠. 그럼 해결이 될까요? 순간이 지나면 그 감각은 모습을 변화하고 있어요. 잘 달래고 받아들인 감각은 새로운 소리를 품습니다. 그 소리는 어떤 성가보다 더 성스럽게 마음에 스며듭니다. 그리고 통증을 치유하는 좋은 연고로 숙성됩니다.



 올해는 통증과 함께 시간이 변화했습니다. 봄에는 심장의 통증이, 이제는 손가락의 통증이 제게 웃음을 줍니다. 저의 시간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감정이 널을 뛰고 소란스럽지만, 예전처럼 허무하진 않습니다. 단지 가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그때로 돌아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의 소리를 찾아 심장의 통증을 잘 잡고 느껴봅니다. 괜찮습니다. 잘 들립니다. 잘 뛰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있지만 괜찮습니다. 다시금 소리가 멈추면 손가락에 힘껏 힘을 담아 느껴지는 고통을 즐기며 건반을 두드려 심장을 깨울 겁니다. 멈추지 말고 더 아름답게 울려라! 울려라! 하고 기도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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