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진작가

<안식처>, <식물공동체> 소개

by Prosh 사회인

유하영 <안식처>

‘유하영 작가’의 <안식처>는 여러 번 봤을 때 진가(眞價)가 서서히 드러난 작품입니다. 전체적인 그림 분위기를 보면 털실, 돌, 팔각정, 상자 속 돌과 나무들이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인공물과 자연의 조화였습니다. 신기하게도 털실에 대한 이질감이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조화롭고 센스있었습니다.

유하영 작가는 이 그림을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집안 곳곳에 어머니께서 나의 옷을 떠주시려고 사다 둔 털실들과 부모님과 동생이랑 함께 산을 탔을 때 있던 팔각정과 큰 바위와 나무들이 생각난다. 이제는 느낄 수 없는 향수를 나의 기억 속 안식처에 담아봤다.”라고 설명했습니다. 털실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이 작품에서 털실은 인공물의 개념이 아닌, 그녀의 생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연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어머니의 愛가 담긴 ‘털실’, 가족들과 함께 등산한 ‘팔각정과 전경’의 상상 속 모습은 향수의 향을 더 진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전체적인 위치에 짜임새 또한 보기 좋았습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 위치가 아니라 다르게 배치했으면 이상했을 것 같습니다. 십장생(十長生)의 요소인 돌과 나무를 잘 활용했습니다. 특히 왼쪽 맨 위의 털실은 해나 달을 표현한 걸까? 하는 재미도 들게 했습니다.

혜곡 최순우 선생의 저서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에서 ‘완벽한 그림은 완성된 작품에서 뭘 좀 넣게 된다면, 뭘 좀 빼게 된다면 이상해져 버린다.’라고 저술한 적 있습니다. 이 그림은 혜곡 선생의 말처럼 뭘 더 넣거나 뺐으면 이상한 그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완벽한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가족과의 시간이 있었기에 ‘유하영 작가’의 <안식처>가 완성됐고, 유 작가는 이것을 기억하고 그렸기에 이 그림을 존재하게 했습니다. 가족과의 화합이 있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지, ‘가족’이라는 상대적 존재가 없었다면, 이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전적 이상세계와 동양의 여백 美, 동양화의 편안함을 잘 담은 이 작품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방에 걸고 싶은 작품입니다.


성다솜 <식물공동체>

‘성다솜 작가’의 <식물공동체>입니다.

성 작가의 작품 설명 덕분에 <식물공동체>가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처음으로 작업실에서 키우게 된 식물들은 따뜻함을 지니고 있었다. 돌봐주는 이상으로 큰 기쁨을 주었다. 관찰하면서 드로잉을 하고 나면 조그마한 변화도 눈치채게 되었고 그 변화들로 기분 좋은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식물을 키우면서 모든 것에 진심으로 생각하고 가까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을 살기로 하였다. 인생이 예술이 될 수 없을까, 그것도 따뜻한 예술. 따듯함을 비치려면 행복하게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난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했고 식물의 따스함을 보고 있노라면 작업실에 가고 싶지 않던 날도 그 따스함을 느끼러 작업실에 가는 나 자신이 보였다. 언제 어디서 건 식물을 볼 수 있지만, 그 모양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고 식물들이 뒤엉켜 있는 것을 드로잉 할 때는 그 속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때 나는 자신이 선인장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이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선인장이라고 생각했고 단지 차이는 가시가 많거나 적거나 많이 찔렸거나 덜 찔렸거나였다. 뒤엉켜 있는 선인장들은 서로 상처받은 것을 치유 받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많은 가시에 찔리고 찔리게 하고 치유 받고 치유해 주는 관계가 사람 관계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갈수록 식물 하나하나가 돋보였으면 했다. 서로 다른 개체들이 모여 함께 있는 모습을 만들고 싶었다. 공간 속 식물들은 함께하고 이것은 우리라고 불리며 모두 다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비슷한 건 있어도 똑같은 건 없다. 환경과 상황 모든 복합적인 것들로 둘러싸여 식물 구성원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제각각의 모습을 살고 있다. - 성다솜” (필자가 굵음 처리함.)

이 작품은 외관적으로는 ‘인공물’로 ‘식물’을 표현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에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들고, 인간을 식물에 투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작품에서 식물은 각각 다른 모양, 다른 색으로 존재합니다. 각각 다른 모습의 식물이기에, ‘각자의’ 식물로 존재합니다. 성 작가는 ‘공동체’로 작명했지만, <식물공동체>는 현대‘사회’를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조화로운 상태에 놓여있고• 정과 의리의 세계지만, ‘사회’는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끼리 이익을 중심으로 모여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회’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관계 속 ‘찔림의 아픔’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픔에서 우리는 치유하고 받는 관계가 되고, 각자의 다른 상태가 나타나고, ‘다른 상태’ 때문에 ‘타인’과 ‘나 자신’의 차이점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우리는 각자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식물공동체>는 성 작가에게 ‘반성과 깨달음의 작품’입니다. “한때 나는 자신이 선인장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이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선인장이라고 생각했고 단지 차이는 가시가 많거나 적거나 많이 찔렸거나 덜 찔렸거나였다. 뒤엉켜 있는 선인장들은 서로 상처받은 것을 치유 받는 것도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수많은 가시에 찔리고 찔리게 하고 치유 받고 치유해 주는 관계가 사람 관계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누구나 선인장처럼 찌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찌름도 아픔의 찔림이 있고, 주삿바늘처럼 치유의 찔림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치유를 주는 공동체를 이루며 제각각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식물공동체>에서 ‘찔림’은 아픔도 있지만, ‘피톤치드’ 같은 치유의 느낌도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얽히고설켜 ‘존재’한다는 의미를 <식물공동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合)의 존재입니다. ‘너’의 영향에 있었기에 그 영향을 받은 ‘나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성다솜 작가가 잘 보여줬습니다. 만약, 성 작가가 ‘타인’과 ‘자신’사이의 ‘인간관계’와 ‘식물’이 삶에 없었다면, 앞서 말한 점을 깨달은 ‘성다솜 작가’도 존재하지 않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작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매달려 있는 식물들은 우리가 집 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미 없는 ‘식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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