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의 생애
“주희 몰후 270년, 명 건국의 대략 100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 왕양명이다. 부친인 왕화는 과거수험생 최고의 영예인 전시의 수석합격자―통상 장원이라고 불린다―였다. 왕양명의 본명은 수인 즉 ‘인을 지킨다’라는 의미이다. 양명이라는 것은 그의 호인데, 주자의 본명인 희가 희미한 빛을 의미하고 호가 회암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왕수인과는 그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양자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p. 52)다.
왕수인은 주자학에 의문을 가진 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주자와 달리 “왕수인도 경서를 으뜸으로 하는 여러 전적을 독파하였지만, 주희와 같이 그것을 체계화하는 지적 영위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과거관료로서 성공하여 정부 고관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주희가 사망하고 나서 주석에 주석을 되풀이하는 방식이 널리 퍼졌고, 전체를 조망하기에 그 방법을 가지고는 전혀 효과가 오르지 않았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왕수인에게 경서의 주석이 없다는 사실은 그 후 양명햑 전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pp. 53~54)
왕수인의 제자인 전덕홍에 따르면 “그의 학술과 교설이 세 번 바뀌었다고 한다. 즉 처음에는 수사의 학, 그 다음에는 불교와 도교에 심취해 있었지만 결국은 성인의 학에 목표를 두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배움이 세 번 변하다”이다.”(p. 54)
“그가 명확하게 주자학과 결별한―결별하였다고 알려져 있는―것은 관직에서 좌천되어 귀주의 산간지대에 머무르던 37세로 “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져 있으며 외부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라고 깨달은 바에서 기인한다. (중략) 그 후 강서의 지방관을 역임하여 이 지방 출신인 육구연의 교설을 접하고 언급할 기회가 늘어난다. 그 중에서도 “성인의 학이란 심학이다”라고 하여 육구연의 심즉리설을 찬양하였다. 때문에 후세에 양명학의 원류를 육구연에서 찾아 육왕심학이라고 불렀다.”(pp. 54~55)
왕수인에 의하면 “우주의 온갖 존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본래의 모습대로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유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그는 이정 이래 도학이 강조해 온 만물일체의 인도 양지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의해 올바르게 실천된다고 생각했다.”(p. 55)
왕양명이 죽은 이후 그의 제자들은 “왕수인이 열거하고 있는 사례가 결코 주희 만년의 것이 아니라고 논함에 따라 실증적으로 부정되었다. 그러나 왕수인이 철저하게 주희의 올바른 후계자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고자 했던 사실은 양명학의 성격을 생각할 때는 매우 중요하다.”(p. 57) 양명학은 주자학에 반(反)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양명학은 철저하게 주자학의 연장된 전개 형태이다. 주자학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며, 애당초의 문제의식부터가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 주류파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주자학이 구축한 구조 속에서 이의 제기를 행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p. 57)
양명학은 ‘심즉리설(心卽理設)’인 입장을 기초로 깔고 들어간다. “객관 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왕수인은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했고,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기에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주자학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며, 애당초의 문제의식부터가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 주류파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주자학이 구축한 구조 속에서 이의제기를 행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p. 57)
양명학과 주자학의 대립적인 모습은 서양철학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후대 철학의 모습과 유사해 보인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아무리 비난해봤자 그들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고, 그들이 없었다면 비판의 구조도 생겼을 수 없다. 결국,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그렇다고 해서 후대의 철학·양명학이 쓸모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리의 뜻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에서 가장 대표적인 말은 ‘성즉리와 심즉리’이다. 주자학에서는 성즉리를 양명학에서는 심즉리를 중히 생각한다. 성즉리와 심즉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인 말은 ‘리(理)’이다. 리는 옥의 주름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귀하게 여겨졌다. “옥이 지니고 있는 문양으로서 주름은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용법이 변하여 사물 일반에 과해서도 ‘그렇게 있어야만 할 주름’을 ‘리’라고 부르게 되었”(p. 108)다.
허나 신기하게도 리(理)의 의미는 <논어>, <맹자>에서도 볼 수 없다. “이것은 문헌학적으로 볼 때 이들 서적이 성립한 시점에서 아직은 그러한 용법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p. 109)한다. 이를 통해 일본의 이토 진사이와 중국의 대진은 본래의 유교에는 리가 없는데 주자학이 날조한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했다.
허나 리는 삼국시대 3세기와 화엄교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이 때문에 주자학과 양명학에서 “리의 연원을 이러한 용법으로 찾아서 그 의의를 강조하는 견해도 존재한다.”(p. 109)라고 말한다.―하지만 리는 “반드시 이러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맥에 한정되지 않는, 이 글자가 내포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용은 일반화되어 있었다.”(p. 109)― 리는 송대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 표현어일 것이다. 그랬기에 당시 사람들은 “현학이나 화엄교의 깊은 소양이 없어도 주희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p. 111)다.
실제로 주희와 문인들과의 문답에서 ““리(理)란 무엇인가”라는 논의가 이루어진 흔적은 보이지”(p. 111) 않았다. 리는 “술어 형태로 쓰여 설명 해주는 말”(p. 111)이었고, “형태의 주어로서 설명을 요구하는 말”(p. 111)은 아니었다.
주희&주자학
이정(二程)철학―정호·정이―의 충실한 후계자인 주희는 ‘성즉리’와 ‘성’을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한 것은 장재의 ““심은 성과 정을 통괄하는 것[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는 구절”(pp. 114~115)이다. 주희가 장재의 이론을 인용했어도 이것은 “단순한 인용의 재인용”(p. 115)일 뿐이다. 그렇지만 주희가 이러한 구절을 많이 이용했다는 점은 그만큼 이 구절이 “주희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 편의적으로 상황에 좋게 이용되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간파할 수가 있다.”(p. 115)
그는 ‘미발(未發)’을 통해 유교 수양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미발이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아직 만나지 않은 상태라서 감정이 생기지 않는 단계다. 노(怒)의 감정도 그러하다. “인륜에 위배되는 행위를 알고 난 경우에는 오히려 화내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그 분노의 표출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표출의 방법은 절도에 들어맞아야 할 것 (중략) 그것이 인경자로서의 군자가 취해야 할 행동이라고 한다.”(p. 117)
주자학과 양명학의 심의 주체성
주자학의 심즉리를 본 양명학은 이를 비판한다. 양명학에서 말한 ‘심은 리이다’는 “‘하지만 성은 리가 아니다’라는 함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p. 119) 성즉리에 관한 비판보다 오히려 문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에 있었다.
주자학은 심과 성을 구분 짓는 데 반해 양명학에서는 심도 성도 같은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성즉리는 심즉리가 됐다. 주자학은 “주희 자신의 분석주의적인 지향과, 애제자 진순이 거기에 더해 과장하고 제멋대로 정리한 일에 의해 이 개념들을 구별하는 일과 상호관계의 설명에 열심히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p. 120) 의문이다. 그리고 주자학의 체계성은 “개개의 용어를 엄밀하게 정의해 가는 작업에 따라 성립한 것이다.”(p. 120)
허나 양명학은 그렇지 않았다. 주자학이 절실한 과제―유교 수양론―를 아무런 관계없이 끝내 왕수인이 주자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외물[바깥 사물]에 대처할 때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사물과 접하기 이전에 미리 마음을 수양해 둔다.” 주자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경의 수양법은 (중략)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무시한 책상 위의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pp. 120~121) 외물(外物)과 접촉할 때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갖추는 것은 양명학의 사상마련(事上磨鍊)에 가깝다. “거기에서는 미발·이발이라는 단계가 성립하지 않는다.”(p. 121)
심과 성을 수양론상에서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왕수인의 사고방식에서 심은 “외물을 느끼고 움직이는 그 자체의 올바름이 리”(p. 121)이다. 결국 주자학 양명학에서 心을 사용하지만, 그 내면의 실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주희는 구체적인 각 사물의 리理를 궁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격물이라 했다.”(p. 123) 이를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 천하를 다스린다고 했다. 반면 왕수인은 사람의 마음에 근본을 두었다. 사람들과 사귀는 것까지도 자기수양이고 평천하라 말했다. “양명학 비판을 통해 주자학의 사회론적 특성은 더욱 선명해진다.”(p. 123)
마치며
이 책을 읽으면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이해>가 떠올랐다. 마루야마는 자신의 저서에서 주자학을 “그것은 실로 본래적으로 실용적인 성격을 가진 유교라는 사상이 가질 수 있었던 일찍이 그런 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마 앞으로도 없을(양명학이라 하더라도 체계의 광범위함에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거대한 이론체계였다. 거기에는 하나가 무너지면 금새 모든 구성이 무너져버릴 정도의 치밀한 정합성<整合性>이 있었다.”(마루야마 마사오(1995).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역). 통나무. (원본출판 1983년). p. 127)
‘치밀한 정합성’이 후대 주자학자들의 이론적 창조성을 제한하게 했다. 그 이유는 주자학이 갖는 폐쇄성 때문이다. 이러한 폐쇄성은 주자학 자체가 지니는 완성·완결된 체계 때문에 후대 주자학자들이 마땅히 창출할 것이 없었다. 이에 반해 양명학파 사람들은 창출할 것이 많았다.
그렇지만 양명학은 “역사적 사실로서 양명학은 철저하게 주자학의 연장된 전개 형태이다. 주자학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며, 애당초의 문제의식부터가 당시 유행하던 주자학 주류파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주자학이 구축한 구조 속에서 이의 제기를 행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p. 57)
그리고 주자학보다 양명학은 미결된 학문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미결상태’는 완결 전까지 영원하다. 그래서 주자학보다 양명학의 학문적 진보는 ―현대 학자들이 의지가 있다면―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1. 고지마 쓰요시 (2004). <사대부의 시대>. (신현승, 역). 도서출판 동아시아. (원본출판 n.d.) / 이 글에서 위 책을 인용할 때 쪽수만 표기하겠음.
2. 마루야마 마사오(1995). <일본정치사상사연구>. (김석근, 역). 통나무. (원본출판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