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닫히고, 집만 남았다

by 고쳐 쓰는 이작가

생각보다 이삿짐은 많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가성비 좋게 골랐다며 만족했던 것들이 그 사이 예쁜 쓰레기가 된 탓이었다. 장롱의 뒷판은 뜯어졌고, 서랍은 아귀가 맞지 않았으며, 침대는 헤드 부분이 덜렁거렸다. 2인용 소파 역시 스프링이 느껴질 정도로 쿠션이 꺼져버렸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첫 신혼살림을 차릴 때 각자의 역할을 나눠 나는 가구를, 남편은 가전을 주로 골랐더랬다. 4년 후, 내가 산 것들 대부분에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예쁜 것만을 쫓은 나의 완패였다.


덕분에 우리는 42평의 커다란 도화지를 채워야 하는 설레는 숙제 앞에서도 신중해질 수 있었다. 전세집이기에 무턱대고 샀다간 또다시 쓰레기만 잔뜩 나올 터였다. 각자의 작업실이 생기면서 책상과 의자를 추가로 구입했고, 없었던 식탁도 새로 샀다. 침대와 소파도 튼튼한 걸로 구입했다. 욕심을 부려 작은 사이즈의 김치 냉장고와 건조기도 들였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맡아야 했던 김치 냄새도, 빨래를 할 때마다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어 말렸던 수고로움도 사라졌다. 그야말로 삶의 수직상승이었다.


화면 캡처 2026-02-25 190408.png


이사를 한 날이 2020년 2월 17일. 부지런히 정리를 하고 살만해지니,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터졌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꼼짝없이 집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가족을 만나기도, 친구와 어울리기도 어려웠던 시기. 여행은 꿈도 못 꿨고, 제사는 온라인으로 지냈으며,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일순간 멈춰버렸던 시절. 각자의 집에 감옥처럼 갇혀 살며, 비대면과 고립이 일상이 된 세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갇힌 집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았다. 양가 부모님이 과하다며 걱정하셨던 넓은 집에서 우리만의 ‘슬기로운 고립 생활’이 시작된 거였다. 대단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공간이 주는 여유에 숨 쉴 틈이 생겼달까. 각자의 방은 사무공간이 되었고, 밥을 먹는 식탁은 때때로 카페로 변했으며, 작은 베란다는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는 캠핑공간으로 둔갑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집 안 구석구석을 재발견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방으로 흩어질 수 있다는 것도 생각보다 큰 자유였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 관계를 지켜주기도 했다. 만약 전 집의 좁은 거실에서 둘이 하루 종일 붙어 지내야 했다면 어땠을까. 코로나 시기 이혼율이 급증했다는데, 우리 역시 피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집이란 따뜻한 보금자리,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돌아와 두 발 쭉 뻗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넘어 오래 머물 삶을 담을 그릇이라는 생각을 이때 했던 것 같다. 그릇이 커진 만큼 우리의 일상도 전보다 다채롭게 담겼기 때문이었다. 취향과 습관, 가치관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공간,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단절시켜 주는 유일한 안식처,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삶의 서사가 쌓이는 기억의 저장소.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만나 두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기록되는 무대인 만큼, 집은 사는(Buy) 곳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커졌다.


그렇게 집의 의미를 새로 배우던 시기, 우리는 동시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이 좋아질수록,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또렷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전셋집은 결국 ‘언젠가 떠나야 할 공간’이었다. 붙이고, 꾸미고, 애정을 쏟을수록 떠날 날이 있다는 사실은 더 선명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이 집 이후의 삶을, 그 다음 집을 막연하게 떠올리기 시작한 건. 사는(Live) 것에 집중할수록 사는(Buy) 문제라는 현실의 벽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전 09화세상에 과한 집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