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갖고 싶다는 갈망은 굴뚝같았지만, 현실은 우리를 전세 시장으로 등 떠밀었다. 집값은 무서울 정도로 가파르게 올랐고, 지금이 아니면 평생 못 산다는 불안감이 ‘패닉바잉’이라는 단어로 뉴스의 앞머리를 도배하던 시기였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이미 추월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의 실거주 통보도 날아들었다. 자녀들 학교 근처로 전세를 살고 있다던 그 역시도 전세금 인상이 감당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파도타기를 하듯 밀어내는 사람과 밀려나는 사람 모두가 부동산이라는 풍랑을 차례로 맞았다. 다시금 짐을 싸야 할 시간이었다.
포장이사라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결국 내가 챙겨야 했다. 여행을 다니며 틈틈이 모은 냉장고 자석과 소품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우리만의 귀중품이었다.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와 매일 밤 끄적거리던 다이어리도 보물이었다. 하나씩 포장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 데 모아두는 것도 나름의 노하우였다.
2년 동안 알게 모르게 늘어난 짐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했다. 새로 산 옷만큼 안 입는 옷은 분류해 내놓고, 혹시 몰라 가져왔지만 이사 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물건들도 처분했다. 구획별로 잘 정리해두는 것도 다음 집에 짐을 풀기 수월해지는 비법이었다.
김치찜과 볶음김치, 석박지 된장지짐은 냉장고를 비우는데 일조한 메뉴들이었다. 이사 때 냉장고를 비우지 않으면 몇 년을 묵혀둘지 모르는 일이었다. 반복되는 메뉴와 빈약한 밥상에 남편의 투정도 더해졌지만 이사를 앞두고 꼭 치러야 할 거사였다.
세 번째 전세집은 경기도 시흥에 둥지를 틀었다. 치솟은 서울 집값에 밀려난 탓도 있었지만,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내가 운전을 시작해 선택지가 넓어진 덕도 있었다. 서울이라는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남편이 원했던 넓은 평수를 지키기로 한 거였다. 이 역시도 우리가 생각한 가성비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우리는 세 번째 전세집에서도 2년만 살고 나왔다. 결정적 이유는 남편의 이직이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10년을 넘게 다닐 만큼 진중한 성격이었기에, 나는 그의 이직을 적극 지지했다. 새 직장인 경기도 고양시와 시흥은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잠이 많은 그에게 새벽 출근은 너무나도 고된 일이었고, 반대로 저녁이 없는 삶은 나에게 너무 쓸쓸하고 외로운 기다림이었다. 까짓거 세 번 이사나 네 번 이사나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이미 이삿짐 싸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으니까.
한 번 더 전세를 구하기로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직한 직장에서 잘 적응할지 모르겠다는 남편의 걱정도 한몫을 했고, 집을 살만큼 우리의 취향이 확고해졌는지도 의문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 때의 로망이었던 단독주택은 우리의 성향상 어렵다고 판단내린지 오래였다. 광명의 19평 구축 아파트, 서울의 42평의 나홀로 아파트를 거쳐 시흥의 43평 아파트까지. 평수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지만, 관리비며 부모님 눈치까지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네 번째 전세집을 구할 때는 전과 다른 조건을 우선하기로 했다. 30평 대의 신축 아파트, 높은 층수, 탁 트인 뷰. 모두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집이었다. 겪어봐야 어떤 게 우리 취향에 맞을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집을 사기 전 마지막 전세집이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한 달을 넘게 집을 보러 다녔다.
그렇게 네 번째 전세집에서 짐을 풀며 우리는 다짐했다. 다음에는 누군가의 통보가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하겠다고. 2년짜리 정거장이 아닌 영원한 종착역으로 향하는 짐을 싸겠노라고. 그렇게 우리는 다섯 번째 도장을 찍기 위한 마지막 유목 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