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락은 못 달아요

by 고쳐 쓰는 이작가

110v 콘센트와 여러 겹 덧발라 두꺼워진 도배지, 벽에서 떨어져 달랑거리던 화장실 조명. 우리가 처음 마주한 신혼집의 풍경이었다.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 19평의 좁은 집이었지만 주방이 생각보다 컸고, 볕도 잘 드는 편이었다. 도배나 장판을 따로 하지 않더라도 잘 쓸고 닦으면 살 만해 보였다. 걱정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잔금을 치르는 날, 집주인이 도어락은 안 된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벽에 못 하나 마음대로 못 박는 게 임차인의 삶이라지만 도어락을 못 달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열쇠를 써야 한다니. 우리 돈으로 도어락을 사서 달고, 나갈 때 두고 가겠다고 해도 집주인은 완강했다. 자기 집 현관에 구멍이 뚫리는 게 싫다는 거였다. 가방 속 열쇠를 찾느라 현관문 앞에서 쩔쩔매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머니가 있는 옷에 손이 갔다. 외출을 할 때도 “열쇠 잘 챙겼어?”가 서로의 당연한 인사가 됐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참 거추장스러운 게, 임차인의 삶이었다.


그래도 신혼버프는 대단했다. 안방은 인터넷으로 산, 화이트와 우드가 섞인 장롱과 행거, 침대를 채웠고, 거실은 한쪽 벽에 책장과 TV를, 반대편 벽에는 컴퓨터 책상과 소파까지 알차게 넣었다. 단색의 이불과 베개커버, 유니언잭 디자인으로 맞춘 러그와 발매트, 슬리퍼가 신혼 느낌을 물씬 내줬다.


내가 꿈꾸던 집은 빨리 들어오고 싶은 공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소리지만, 결혼 전 나에게 집은 들어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곳이었다. 삼 남매가 복작거리며 커 온터라 내 것 네 것이 없는 삶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단골 대사인 ‘이놈의 집구석, 내가 나가든가 해야지’란 말은 우리집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편이 바라는 집은 따스한 공간이었다. 외동인 남편은 맞벌이를 한 부모님 밑에서 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퇴근을 하고 오면 불이 켜져 있고, 반기는 사람과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공간이 그가 바라는 집의 로망이었다. 나의 경우엔 밖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는 시간보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이 월등히 길었다. 남편이 바라는 부분도 자연스레 충족됐다.


잔소리할 부모 없이 둘뿐인지라 한동안은 말 그대로 살판이 났다. 매일 요리하는 재미에 빠졌고, 음식 맛이 좋다는 핑계로 술을 곁들였다. 취기가 오르면 침대로 뻗으면 되니 세상 이렇게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신혼생활을 두고 소꿉놀이를 한다는 표현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었다. 당시의 집은 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낭만의 비용은 생각보다 컸다. 부모님과 살 때는 몰랐던 아파트 관리비와 도시가스비, 인터넷 비용 등 각종 공과금은 모아놓으니 상당했다. 치약, 휴지, 하물며 면봉까지 전부 비용이었다. 결혼하면 어른이 된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그제야 부모님이 돈돈 거리던 게 이해가 됐다.


2년을 살고 계약을 연장해 다시금 2년. 도합 4년을 살다보니 불만도 쌓였다. 잠만 자는 안방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생활을 거실에서 보내다보니 너무 붙어있는 것도 독이 됐다. 남편은 내가 잠들고 난 뒤 새벽에야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고, 기상시간이 늦어지니 깨우는 사람 입장에선 짜증이 늘었다. 자기만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남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이대론 못 살겠다는 남편의 불만이 터져나올 때쯤 계약 만기 날짜가 다가왔다. 다음 집을 찾아야 할 타이밍이 온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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