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첫 독립을 했습니다만

이삿짐 싸는덴 이골이 났는데요,

by 고쳐 쓰는 이작가

첫 집의 기억은 각별하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 둘이서 처음으로 '어른 노릇'을 하게 된 경험이 그곳에 고스란히 묻어있기 때문이었다. 4년을 내리 살며 쌓인 추억은 집의 평수보다 훨씬 컸다. 너무나도 다른 성향의 우리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도,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밥을 먹고 잠드는 평범한 시간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시작이었다.


광명에 첫 신혼집을 얻게 된 이유를 말하려면, 결혼 전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남편과 나는 인천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코찔찔이 시절부터 사귀었을 리 만무하니, 놀라움은 잠시 넣어두시길. 스무살 동창회에서 재회한 후로 우리의 인연은 5년은 친구로, 이후 6년은 연인으로 이어졌다. 긴 시간 만남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거리가 큰 몫을 차지했다. 남편의 집은 초등학교 때 살던 그 집 그대로였고, 우리집은 한 차례 이사를 갔지만 여전히 그 동네에 머물러 있었다.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 그만큼 자주 만나니 마음도 가까워지고 그러다 몸도 가까워졌다는, 결론이다.


신혼집을 광명으로 정한 데에는 그 거리가 결정적 이유였다. 시댁도, 친정도 너무 가까워 이대로라면 결혼을 해도 독립했다는 느낌이 안 들터였다. 결혼을 약속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가훈 정하기였을 정도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말하는 대로 산다고 믿어왔기에, ‘존중, 이해, 배려’를 가훈으로 정했다. 이 세 가지면 다툴 일도, 다퉈도 남이 될 일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남편의 직장이 광명에 위치해 있다는 것 또한 이유기도 했다. 프리랜서인 나에게 맞추기보다는 매일 출퇴근을 하는 남편에게 맞추는 게 합리적이었다. 남편은 결혼을 하면 이제 가족은 너와 나, 둘 뿐이라고 말했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둘이서 헤쳐나가는 것. 부부라는 이름 아래 단단한 한 팀이 되는 게 결혼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이뤄야 할 과업이었다. 그만큼 우리는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꿈꿨다.


당시 내 통장에는 1억 원이 좀 넘는 돈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월 50만 원을 벌 때도 무조건 저축을 해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에 따라 차곡차곡 모아 온 8년 간의 성과물이었다. 반면 남편의 통장은 텅텅 빈 텅장이었다. 연애를 하는 동안 데이트 비용의 대부분을 그가 써왔으니 어찌보면 이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의기소침한 그에게 “열심히 일하면서 같이 모으면 되지!”라고 말했던 건, 1억 원이면 둘이 살 전셋집 하나는 구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 때문이었다. 결혼 얘기가 오가기 전까지는 둘 다 집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집값이 얼마인지 가늠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10년 전인 2015년에도 집값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 패닉은 부동산 기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키워드였다.


처음 찾아간 역 근처 부동산 중개소에서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1억 원으로 신혼 전셋집을 구한다고 했을 때, 보여줄 집이 없다는 대답은 당시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내 기준에서 1억 원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지만 당시 들썩이던 광명 부동산 시장에서는 전셋집의 현관문조차 열지 못할 만큼 가벼운 금액이었다. 처음 겪어본 좌절감이었다.


평수를 줄이고, 연식을 올리고, 역과의 거리를 늘려가며 집을 알아봤다. 부족한 금액은 감사하게도 시부모님이 도와주셨다. 500만 원을 깎아가며 1억 6,500만 원에 계약한 집은 남편 회사와 불과 3km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1989년에 지어진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지만 우리가 찾는 조건에는 딱 맞았다. 부모님께 손을 벌렸다는 무거운 마음만 제외한다면.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독립을 했지만 여전히 부모의 도움이 절실한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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