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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Mar 12. 2020

만학도의 파이팅 넘치는 교대 생활

이런 것도 배워야 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것들을 두루두루 배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교대의 커리큘럼은 정말로 방대했다.


교육학,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컴퓨터, 미술, 음악, 체육, 실과, 도덕. 중에서도 나를 정신없게 만든 것들은 음미체실, 예체능 계열의 교과들이었다.


교대는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종합대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이기 때문에 캠퍼스도 그리 넓지 않다. 한 바퀴 빙 둘러 걸어도 숨차지 않을 정도의 크기다. 하지만 나는 종종 숨을 헐떡이며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다른 수업을 들으러 갈 때마다 건물을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날 들어야 하는 수업이 3과목이라면 건물 세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예체능 수업은 매일 있는 편이었다. 대부분 앉아서 교수님 말씀을 듣다 나오는 다른 교과에 비해 예체능은 더욱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피아노를 치거나 배구공을 튀기거나 혹은 그림을 그리거나 요리를 하다가 늘 정신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수업 들으러 정신없이 뛰어가곤 했다.




교대에서 배우는 것들 중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게 하나 있는데 바로 피아노 수업이다. F학점을 받으면 졸업을 할 수가 없다. 꼴랑 1학점짜리 수업인데도 수업 시수는 2시간이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매 시간 악보 그리기와 같은 과제가 있었고, 동요 반주를 연주해서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노 수업을 들었던 학기에는 거의 매일 피아노실에 가다시피 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운 경력이 있었지만 손 놓은 지가 오래라 악보 보는 법도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서 다시 기본부터 배웠고, 매일 음악관에 있는 피아노실에 가서 연습했다.


음악관에 있는 피아노실

피아노 수업에서 패스를 받기 위해 넘어야 하는 산은 바로 자유곡 연주였다. 이것이 마지막 관문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그전에 해온 것들이 다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나는 드라마 황진이 OST 중 '마음 주지 않는 꽃'을 선택해 열심히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연주하는 동안 녹음을 해서 들어보고 다시 수정해서 쳐보고를 반복했다. 실전에서 너무 긴장한 탓에 실수를 해서 아쉬웠지만 어쨌든 끝났다는 데에  나는 만족했다. 아마 잘하고자 하는 과한 욕심이 긴장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다니. 그제야 내가 이 수업에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 A0학점을 받은 걸로 기억한다.




가장 힘들었던 수업은 역시 체육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라 음악수업도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고, 그림그리기도 하고 뚝딱뚝딱 만들기도 하는 미술 수업 역시 재미있었다. 실과도 상추를 기른다든지, 액세서리 걸이를 만든다든지, 샌드위치 만들어 먹는다든지 해서 재미있었다.


문제는 체육이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배구 때문에 내 손목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학창 시절 날아오는 농구공을 얼굴로 받아본 이후로 나는 공을 무서워했는데 배구공은 너무 딱딱해서 더 무서웠다. 매일 연습하고 남은 멍자욱이 두려움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몸 사리며 했지만 손목은 계속 아팠다. 겨우 B학점 받고 마무리 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나는 이도 감지덕지였다.


나는 장학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수업에 열심히 임하려 했다. 정말 의욕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렸다.

2학년 때였던가. 그 날은 멀리 뛰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운동장 모래가 별로 없는 곳에서 연습을 하고, 모래장으로 가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의욕이 과했던 나는 연습도 너무 열심히 했다. 다른 동기들은 연습시간엔 감 익히는 정도로만 살살하고 실전에서 열심히 했지만 나는 연습부터 과했다. 그 결과, 연습한 만큼의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끝내야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허리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래가 많지도 않은 곳에서 과하게 연습한 결과, 허리를 삐끗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나는 병원에 가게 되었다. 허리를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푸르스름한 멍도 달고, 허리는 삐끗해서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만학도의 이 파이팅 넘치는 교대 생활은 결국 장학금으로 돌아왔다. 9살 어린 동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도 있지만 사실 나는 배우는 모든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만큼 행복한 배움의 순간들이 많았다. 나이 들어 하는 공부가 어쩜 그리도 재미있던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현재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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