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늙어갈 운명 공동체

[만50세 N잡러의 하루-5편]

by 코리아앤

마음이 힘겨울 때는 법륜스님의 영상이나 글귀를 찾아본다. 법륜스님은 유쾌하신 분 같다. 인간 세상에 대한 튼튼한 통찰력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문즉설 중 많은 질문들이 아내와 남편이 하는 경우가 많다. 스님께서 결혼관계에 대해 하신 말씀 중, 결혼을 해서 상대방의 덕을 보려고 하다 보니, 싸움이 생기고, 미워하고, 가정의 불화도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관점이시다. 그런데, 생각해 볼수록 일리가 있는 말씀 같다.


내 남편과의 만남을 나는 운명이라고 즐겨 말하는 편이다. 구글에서 검색하면,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필연적이고도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의미하며, 한자로는 '運命'이라고 쓰며, '운(運)'은 움직이는 것, '명(命)'은 정해진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영어로 fate 또는 destiny 라고 한다.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운명을 고쳐 쓸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을 하는데, 한자를 보면, 변경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는 것, 2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니, 자기 하기 나름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해, 구글에서는 좀 더 정갈한 표현으로 정리해 놓았다.


남편과 나의 만남은 각자의 엄마를 통해서, 운명적으로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진주라는 대략 인구 30만 소도시에서 자란 시티걸(city girl)이지만, 신랑은 지리산 때문에 유명한 산청군 언저리에 있는 부락마을 출신의 컨츄리보이(country boy)이다. 나는 20대 후반에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 꿈의 도시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남편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의 시어머님께서는 부락마을 근처의 큰 도시인 진주의 재래시장에 장을 보러 오셨다가 단골 옷가게에 들러 옷도 둘러보고, 쉬고 계셨다. 그 옷 가게는 나의 작은 아버지 옷 가게였다. 우리 엄마는 장도 볼 겸 작은 어머니와 인사도 할 겸, 옷 가게 들렀고, 한국 중년 아주머니들은 자연스럽게 수다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두 분은 30대 중, 후반의 딸과 아들이 결혼을 못 하고 있으며, 그들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동시에 전화번호도 교환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났다. 만나고 보니, 우리는 1km 정도 이내 거리에 위치한 원룸에 각각 살고 있었다. 운명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운명은 하기 나름이라고 우리가 부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도 운명을 개척하려는 내 불굴의 의지 보다 정해져 있는 운명의 편이었다.

진주시에는 10월에 개천예술제와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리고 있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라서, 지인들에게 데이트 상대 소개를 부탁하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돈내산으로 당당히 가능한 많이? 남정네들을 만나겠다고 마음을 먹고, 한 결혼정보회사에 가입을 했다. 결혼회사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만남 채널을 최적으로 활용하여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해 가며,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거스르기 힘든 것처럼,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시스템을 통해 만나는 상대방들은 비슷비슷했다. 한국 사회의 관습적 잣대로 보면,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중상급의 연봉을 받는 남자들이었다. 그런데,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키가 다 작았다. 게다가, 쫌생이(표준어는 좀생이)도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났는데, 첫 만남에서 식사비 할인 받겠다고 나에게 할인 카드 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내가 관심이 가는 상대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사랑이든 연애든 결혼이든 쉽지 않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결혼정보회사 가입기간의 중반 무렵에 남편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키가 컸다. 그런데, 나한테는 그닥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잘 통했고, 남편의 삐딱하게, 한 번 뒤틀어서 말하는 것도 신선하고 재미있어 호감이 계속 갔다. (참고로, 지금은 이 말투를 제발 좀 고쳤으면 좋겠다.) 나와 전혀 다른 예술분야에서 일해서 더 호감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 동경심이 있지 않나? 난 그런 편이다. 남편은 개인 미술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학원 운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돈을 쓸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제는 안다. 남편은 돈 관리를 잘 하는 편이 아니라는 것을. 결혼 후, 신용카드 리볼빙 서비스 때문에 연체된 이자비용으로 큰 돈이 나간 적이 있다. 우리는 1년 가까운 시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결혼 후, 2년 정도 더 미술학원을 운영하다 정리하고, 전업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 눈썹 없는 모나리자


나는 바깥 활동이 더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할 계획이었다. 그럼, 그림 그리는 남편으로부터 외조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된 마음도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업에 대한 존중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1970년~1980년대 내가 자라면서 지켜본 한국의 가정에서 아버지가 권위를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권 때문이라 생각한다. 나는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에 피렌체에서 다방면의 예술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 가문에 나를 비유하곤 했다. 나는 그런 관점을 알게 모르게 우리 부부와 가정에 적용하고 있었다. 우리 남편은 나의 그런 마음과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예민도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정도가 다르다. 당연히 남편은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남편은 말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남편도 한국의 권위적인 가정환경에서 자란 중년의 한국 남성이기에 스스로도 우리 부부, 가정의 좀 다른 상황에 대해 힘들어했다. 예술가들의 남다른 예민도에 대해, 무딘 내가 알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랑하며 같이 길어가 보아요!


그 시간이 족히 15년은 걸린 것 같다. 우리 부부 생활은 계속 시행착오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륜 스님 말씀처럼, 상대방으로부터 덕 보려 하지 않고, 보시하는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100세 시대의 남은 시간을 함께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PS : 나의 운명 공동체인 남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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