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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깨달음의 전류

by 박세신

찌릿.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진다.
몸이 아니라 생각이 먼저 멈춘다.
마치 오래된 회로 속에 전기가 다시 통하듯,
잠들어 있던 인식이 번쩍 켜진다.
그건 통증처럼 오지만,
이상하게도 시원하다.
그게 깨달음의 찌릿이다.


깨달음의 찌릿은 느리게 온다.
몸이 먼저 느끼는 감정의 전류와 달리,
이건 천천히 스며든다.
아무 일도 없는 오후,
문득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달라 보이는 순간,
혹은 평생 믿어온 한 문장이
더 이상 나를 위로하지 못할 때,
그때 전류는 흐른다.
“아, 내가 틀렸구나.”
“이건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그 깨달음은 아프고, 아름답다.


사람은 스스로를 안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만 산다.
깨달음의 찌릿은 그 질서를 깨뜨린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강렬하다.
그 짧은 찌릿이 지나가면
세상의 윤곽이 바뀌어 보인다.
전에는 선이었던 것이 흐릿해지고,
모호했던 것이 뚜렷해진다.


깨달음의 찌릿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
책 한 줄, 누군가의 한마디,
혹은 내가 내뱉은 말이 되돌아와
내 가슴을 찌른다.
그때 알게 된다.
배움은 가르침으로 오는 게 아니라
충격으로 온다는 걸.
깨달음이란 결국

내 생각의 회로를 감전시키는 일이다.


그 찌릿이 깊을수록 사람은 조용해진다.
큰 깨달음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건 외침이 아니라 침묵의 번개다.
말하고 싶은 욕망보다
잠시 멈추는 감탄이 먼저 온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본다.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기 전의 나를.


어떤 찌릿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다.
그건 방향의 전환이다.
내가 믿어온 정의가 무너지고,
내가 옳다고 여긴 것이 부끄러워질 때,
그 전류는 내 시선을 돌린다.
깨달음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보는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그게 모든 변화를 시작하게 한다.


때로는 그 찌릿이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남들은 여전히 편안하게 웃는데,
나만 다른 풍경을 본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다른 의미로 들리고,
같은 하루를 살아도
어딘가 결이 달라진다.
깨달음은 기쁨이면서, 이탈이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동시에,
익숙한 세계와 멀어지는 일이다.


그래도 사람은 계속해서 찌릿을 원한다.
그건 진통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다.
모든 앎은 통증을 동반하지만,
통증 없는 깨달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찌릿의 순간이 강렬할수록,
그 다음의 고요는 단단하다.
감정은 흔들리지만, 깨달음은 남는다.
그게 둘의 결정적 차이다.


깨달음의 찌릿은 불꽃이 아니라 불씨다.
순간 번쩍이지만, 오래 타오른다.
그 여운이 삶을 바꾼다.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이 한 문장을 남기고 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감각이 시작된다.
세상은 예전과 같지만,
내 눈이 달라진다.
그건 배움이 아니라 변이(變異)다.


모든 깨달음에는 반복이 있다.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여러 번 찌릿한다.
잊고, 다시 깨닫고,
또 잊고, 또 번쩍인다.
그 순환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진다.
이건 직선의 성장도, 완성의 서사도 아니다.
그저 계속 깨어나는 과정이다.
찌릿할수록, 인간은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두려워하지 않는다.
감정의 찌릿이 나를 흔들 때도,
깨달음의 찌릿이 나를 바꿀 때도.
그 모든 전류는 결국
나라는 회로를 새로 그려준다.
세상을 다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한 번이라도 번쩍 느낀 적 있다면
그건 살아 있는 증거다.


찌릿.
그건 깨닫는 순간의 전류이자,
변화의 불꽃이다.
한 번의 번쩍임으로
수많은 생각이 재배열되고,
잠들어 있던 마음이 다시 깨어난다.
그 찌릿 이후의 나는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니다.
그게 깨달음이 남기는 가장 조용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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