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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by 박세신

툭, 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뭔가 하나 떨어졌다.

딱히 무언가를 버린 건 아닌 것 같은데, 몸이 먼저 알았다.

아, 이제 좀 그만 붙들어도 되겠구나.

그전까지 나는 붙잡는 것만 배우며 살았다.

관계도, 체면도, 일도, 자존심도. 놓아버리면 끝날 것 같아서, 늘 양손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았다.

붙잡고 있는 동안에만, 나는 계속 “부족한 쪽”에 머문다는 것을.

그래서 그날, 나는 살짝 손을 풀었다.

툭, 하고.


사람들은 버티는 법은 잘 알려준다.
“끝까지 가봐야지.”
“한번 시작했으면 책임져야지.”
“포기하면 거기까지인 거야.”


말은 늘 근사하다.

하지만 이 말들 사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전제가 하나 있다.

지금 붙들고 있는 게 정말 ‘나에게 좋은 것’ 일 거라는 확신.

문제는 그 확신이 대부분 남의 입에서 나왔다는 거다.

부모, 선생, 상사, 친구, 세상.

모두가 내가 어디까지 버텨야 하는지 대신 정해준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정답을 외우듯, 버티는 인생을 외우며.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전기가 한 번 왔고, 나는 슬쩍 깨달았다.

이상하다, 이건 내 인생인데 왜 자꾸 남들이 엔터 키를 누르지?


그래서 한번 멈춰봤다.

멈춘다는 건 큰 결심이 아니었다.

그냥 하루,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을 만들어본 거였다.

그날은 일도 미뤘고, 메시지도 늦게 봤다.

“너무한 거 아니야?”라는 말이 올까 봐 살짝 두근거렸지만,

세상은 의외로 조용했다.

그 사실이 허탈하면서도 웃겼다.

내가 이렇게까지 쥐고 있던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때가 아마 첫 번째 툭이었다.

‘아, 이거 안 잡아도 돌아가는구나.’


툭은 크게 소리 내지 않는다.

문을 쾅 닫는 것도 아니고, 관계를 확 끊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살짝, 내 몫이 아닌 짐을 어깨에서 내리는 소리다.

남들이 보기엔 별 차이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거의 같아 보인다.

출근도 하고, 말도 맞장구치고, 웃을 때 웃고, 수긍할 때 고개를 끄덕인다.

달라진 건 한 가지만 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문장이 속으로 한 줄 추가된 것.


툭은 그 문장이 몸에 자리 잡을 때 나는 소리다.

예전엔 모든 관계를 붙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읽씹을 당해도 먼저 톡을 보냈고, 술 약속이 부담스러워도 대충 웃으며 나갔다.

‘인간관계는 노력이다’라는 명언이 너무 자주 보여서,

안 그러면 내가 게으른 사람일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대화창을 내려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들과의 대화가 지금의 나를 얼마나 살게 하는가?

침묵 끝에 나온 대답은 민망할 정도로 솔직했다.

별로.

그때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오랜만에,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톡창은 조용했고,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대신 내 안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툭.

붙잡지 않았더니, 나는 조금 덜 외로웠다.

억울하게도, 사실을 인정하자 오히려 숨이 편해졌다.


일도 그렇다.

‘성장’이라는 말 아래 얼마나 많은 삶이 갈려 들어갔는지 우리는 대충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야근, 자기 계발, 사이드 프로젝트, 네트워킹.

모든 게 좋은 단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가끔은 그냥 이렇게 느껴진다.

결국 나는 언제 쉬지? 누가 멈추라고 말해줄까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비로소 선택해야 한다.

계속 가느냐, 아님 내가 나에게 멈추라고 말하느냐.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언젠가는 알게 된다.

진짜 어른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멈출 지점을 스스로 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 지점에서 나는 조용히 한 발 물러섰다.

툭.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기듯.


툭은 포기가 아니다.

포기는 ‘나 졌다’라는 느낌을 남기지만,

툭은 ‘나로 돌아왔다’는 감각을 준다.

붙들던 것을 놓았더니 손이 비었고, 손이 비었더니 비로소 나를 잡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놓고 나니 내가 보였다.

남들이 좋아해 줄 것 같은 나 말고, 실패해도 그냥 계속 살아갈 나.

성공해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나.

그 보통의 나를 인정하는 순간, 어깨에서 뭔가 한 번 더 떨어졌다.

툭.

그 소리는 조용했지만, 온몸에 퍼졌다.

해방의 소리는 항상 그렇게 작다.


물론 세상은 이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회사는 아직도 성과를 물어보고, 사람들은 여전히 결과를 궁금해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 속에는 언제나 숫자들이 숨는다.

연봉, 직급, 성과, 결혼, 집.

나는 예전에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살았다.

뭔가를 이뤄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만 대화에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젠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대답할 게 없어도,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면 충분하다고 믿기로 했다.

대화가 불편해질 때면 속으로 작게 속삭인다.

괜찮아, 오늘도 잘 살아 있잖아.

그 말과 함께 또 한 번 어깨가 가벼워진다.

툭.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너무 많은 걸 놔버린 건 아닐까?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게 게으른 건 아닐까?

불안은 늘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묻는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그러면 나는 조금 멈칫하다가, 다시 어깨를 내린다.

괜찮다고, 이게 지금의 나라고.

세상이 원하는 버전의 나를 계속 업데이트하다 보면,

정작 원본은 점점 사라진다.

나는 이제 업데이트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버전업 대신, 그냥 재부팅. 그게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툭의 좋은 점은 드라마가 없다는 거다.

눈물겨운 결심도, 성대한 선언도 필요 없다.

“나 이제 안 해”라고 소리칠 필요 없이, 그냥 조용히 안 하면 된다.

연락을 조금 덜 하고, 일을 조금 덜 하고, 억지웃음을 조금 덜 짓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익숙해진다.

아, 이 정도가 지금 내가 버틸 수 있는 선이구나.

그 선을 스스로 정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누가 만들어준 기준이 아니라, 내 몸이 직접 정한 기준.

그 선 위에서 사는 사람의 어깨는 조금 더 수평에 가깝다.


사실 툭은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크게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처음엔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이미 식은 모임, 가기 싫은 약속, 의미 없는 눈치 보기.

예전 같으면 억지로 나갔을 자리에서 살짝 몸을 돌려본다.

미안하다는 말을 단정하게 건네고, 대신 집으로 향한다.

문을 닫고 나서 잠깐 불안이 밀려온다.

‘이렇게 끊어도 되나?’

그때 거울 앞에서 어깨를 한번 내려본다.

별일 없다. 세상은 그대로고, 무너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때 몸이 조금 배운다. 아, 이 정도 툭은 괜찮구나.


조금 더 익숙해지면 조금 더 큰 것을 놓게 된다.

남들의 기대, 나이에 대한 강박, 비교에서 오는 조급함.

“서른 살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마흔이면 안정돼야지” 같은 문장들을 하나씩 떨어내 본다.

그 문장들을 달고 있을 때의 나는 늘 늦은 사람이었다.

항상 정해진 어딘가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

하지만 그 문장을 툭 내려놓고 나니,

나는 갑자기 ‘제시간에 도착한 사람’이 됐다.

내 시간표 위에서는 내가 정시였다.

남의 시계를 몸에 매달고 살면 평생 지각한 기분으로 살게 된다.

이제 나는 내 시계를 찬다.

가끔 느리면 어때, 그게 내 리듬인데.


툭의 세계에 익숙해지면 하나 더 신기한 게 보인다.

그동안 무겁게 느껴졌던 사람들이 실은 생각보다 가볍게 떠다닌다는 것.

내가 붙들고 있어서 무거워 보였을 뿐, 실제로는 내 책임이 아닌 일들이었다.

누군가의 기분을 관리해 주려던 습관,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주문.

그걸 하나씩 놓으면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됐다.

착함이라는 단어에는 종종 자기 학대가 섞여 있다는 걸.

그래서 이젠 조금 덜 착해지기로 했다.

대신 조금 더 정직해지기로 했다.

세상에 정직한 사람이 하나쯤 늘어나는 게,

과하게 착한 사람이 하나 늘어나는 것보다 조금은 나을 테니까.


가장 어려운 툭은 가족에게였다.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은 어떤 관계보다 무겁다.

참아야 하고, 맞춰야 하고, 견뎌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가족에게 가장 먼저 배운 건 사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이기도 하다.

기대에 못 미치면 죄인 같고,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말하면 배신자 같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도록 가족 앞에서만큼은 툭을 못한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나, 이제 이렇게 살아보고 싶어.”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이 조금 떨리지만,

이미 찌릿을 한번 겪은 사람에게 두려움은 조금 덜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세상은 한 번씩 이렇게 대답하기도 한다.

“그래, 네 인생이지 뭐.”

생각보다 쉽게 나오는 한마디에 그동안 쥐고 있던 죄책감이 한 번에 풀린다.


툭.

알고 보니, 나만 나를 가두고 있었다.

툭을 자주 하다 보면 이상한 자유가 생긴다.

잘 보이기 위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지고,

이해받기 위해 억지로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가 모두 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순간, 관계의 긴장이 풀린다.

누가 내 선택을 비난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래도 난 이렇게 하기로 했어.

이 한 줄이면 충분하다.

설득과 변명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예전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 사이를 건너편에서 구경한다.

아, 저기서 예전에는 나도 소리를 질렀었지.

이젠 조용히 웃는다.

툭의 기술이다.


어쩌면 툭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생활의 습관인지도 모른다.

신호등이 바뀔 때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 선택,

너무 복잡한 설명을 대신해 “그냥 내 취향은 아냐”라고 말하는 용기,

모두 다 하는 유행을 굳이 따라가지 않는 고집.

작은 선택들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기 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이러다 진짜 혼자가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던 그 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조용히 서 있다는 걸.

다들 툭을 연습하고 있었다.

다만 말하지 않았을 뿐.


나는 가끔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가볍게 걷는 사람.

성공담 대신 실패담으로 사람들을 웃길 줄 아는 사람.

버텼던 이야기보다 놓았던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들려주는 사람.

그 얼굴을 떠올리면 몸이 조금 이완된다.

아,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또 한 번 어깨가 내려간다.

툭.

미래에 대한 불안이 조금 떨어진 소리다.


오늘도 하루가 끝나간다.

해야 할 일 중 일부는 밀렸고,

답장하지 못한 메시지 몇 개가 화면 위에 떠 있다.

예전 같으면 이 모든 걸 정리하고 자야 속이 편했을 거다.

하지만 이젠 조금 다르다.

미뤄진 일들, 덜 친절한 내 태도, 완벽하지 않은 하루를 그냥 오늘의 몫으로 인정한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뭐.”

그 말과 함께 불을 끄면 마음 한편에서 작게 소리가 난다.

툭.

하루를 바닥에 두고 오는 소리.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또다시 수많은 의무와 기회가 밀려오겠지만,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

언제든 힘들면 다시 한번 어깨를 내릴 수 있다는 걸.

툭은 한번 배우면 평생 쓸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기술을 제법 괜찮게 사용하는 중인 것 같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는 왜 이렇게 대단한 목표 없이 사니?”

그때 나는 아마도 조금 웃으면서 대답할 거다.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아져 버렸거든.”

그 말이 게으름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긴장과 두려움이 흘러나가야 했는지.

그 과정 전체가 바로 툭의 연속이었다는 걸.

버티는 사람에게는 박수가 쉽게 보내지지만,

놓는 사람에게는 조용한 존중이 필요하다.

나는 그 조용한 존중을 먼저 나에게 보내보기로 했다.

수고했다, 오늘도 잘 버텼고, 잘 놓았다.

그 인사를 마음속에서 작게 건네는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작은 것이 떨어진다.

툭.

그리고 나는 조금 더 가벼운 사람이 되어 잠이 든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후련했던 순간들은 무언가를 얻었을 때보다도,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게 됐을 때였다.

갖고 싶어서 안달 나던 자리,

증명하고 싶어서 잠 못 자던 목표,

끝까지 붙들고 싶었던 사람.

그 모든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순간,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없어도 살겠네.”

이 한 줄이 입안에서 익숙해지는 동안 수많은 욕심과 열등감이 조금씩 말라 떨어졌다.

툭, 툭, 툭. 그 떨어져 나간 조각들 사이로 나라는 사람의 본 모양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았고, 괜찮았다.

나는 내 자신을 끌어 안기로 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자세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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