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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Aug 21. 2021

11년을 함께 한 세탁기를 버렸다.

새 것을 얻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2주 전,

전날까지 잘 돌아가던 세탁기의 전원이 갑자기 멈췄다. 매일매일 사용하던 세탁기가 멈추니 일상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고작 세탁기 하나 멈췄을 뿐인데...


감사가 없었다.

그 많은 빨래를 묵묵히 11년 동안 해왔던 세탁기였다.  제 역할을 다 한 세탁기였는데 막상 쓰려는데 전원조차 들어오지 않음에 답답하고 화가 났다. 멀티탭을 바꿔가며 꽂아도 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안 돌아가니.., 이 많은 빨래들은 어쩌라고..."

주말을 보내고 가득 쌓인 세탁물을 바라보며 남모를 혼잣말을 중얼댔다. 사실 세탁기 잘못이 아니고 사용자의 잘못 일터다. 그런데 애꿎은 세탁기 탓만 했다.


AS를 받고자 전화를 했더니 2주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헉! 2주?'

세탁을 2주나 못하게 되면 수건이며 속옷, 교복 등... 어쩔까 싶어 순간 막막했다. 빨래방에 들고나가 세탁을 해와야 하나? 순간 머릿속에서 최첨단 계산기가 돌아갔다. 일단 급한 것만 들고 아래층 동생네서 해결하자 싶어 연락을 하고 세탁물을 갖고 내려갔다. 그렇게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 4번... 젖은 빨래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이 허리에 무리를 줬는지 허리에서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도 "헉"소리가 났다. 이런...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되어 병원에 갔더니 척추에  통증주사를 놔주시며 통증이 멎을 때까지 매일 물리치료를 오라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참으로 속 편한 소리를 하시는구나.'싶었다. 주부가, 그것도 아이들이 집에 계속 머무는데 매일 두 시간을 빼서 물리치료를 가는 게 가당 키나 한 일인가 싶어 콧방귀가 나왔다. 사실 의사 선생님께 심통이 난 게 아니고 내 심사가 뒤틀렸던 탓인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 복대를 두르고 깡으로 버티기 일주일...


AS를 담당한 기사님께 연락이 왔다.

"고객님? 전원이 안 들어온다고요? 연식이... 10년 넘으셨네요. 메인 보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부품비만 28만 원 정도 되고 출장비가 발생됩니다. 부품 비용이 커서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기사님이 전문가시니까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알려주시겠어요?"

"아마도, 이번 부품을 교체하면 다음 부품들이 순차적으로 고장이 날 것 같습니다. 다음에 고장 예상이 되는 부품은 35만 원 정도 발생하세요. 제가 생각할 때는 새 제품을 구매하시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

결국 세탁기를 교체하기로 하고 출장 서비스를 취소했다.




오늘 새 제품을 설치받고 기사님께 사용 설명을 들었다.

"용량이 커졌다고 해서 세탁물을 많이 넣으시면 안 됩니다. 얇은 이불이라도 1장씩 세탁하길 권해드려요. 세탁물이 기울어져서 세탁기가 흔들리면 고장률이 높아집니다. 세탁물도 가급적 너무 많이 넣지 마시고 자주 세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세탁기 용량을 키웠는데 이전 사용량으로 사용하라는 권고를 들었다. 갑자기... 교체된 세탁기가 나와 함께 지내면서 너무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 탈수과정에서 헛도는 증상이 있어서 드럼세탁기의 한계인가 투덜대며 세탁물 절반을 덜어내고 탈수하곤 했었는데 그런 과정이 사실상 드럼 세탁기에게는 부담이 되는 과정이었던 것을 외면했다. 부담이 될 만큼 넣은 적도 많다. 2번 나누기는 애매하고 1번에 넣기는 좀 많은데 드럼 세탁기의 세탁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우걱우걱 넣은 적도 많았다. '세탁물을 꽉 채운 채 세탁물에 물이 더해지니 더 무겁게 모터가 힘을 받았을 테고 견디다 못해 전원조차 켤 수 없게 되었던 거였구나.' 싶으니 주인 잘못 만난 안쓰러운 세탁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오늘은 11년을 함께 한 세탁기와 이별하고, 신상옷을 차려입은 새 식구를 맞았다.




주부들에게 가전제품 교체는 남다르다.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물건임에도 주부의 전유물같이 느껴지고 가족들도 선물을 안겨준 양 좋겠다고 얘기해 준다. 그런데 오늘의 세탁기 교체는 내게 설렘과 기쁨을 주지 못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잃은 느낌이랄까... 욕심 많은 주인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혹사당하다 조용히 제 명을 다하고 떠난 세탁기가 오늘의 '나' 같았다.


새로 맞이 한 세탁기


관계라는 것에 항상 마음을 쓰게 된다.

주변에 척을 지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 최선을 다하려고 애를 써 본다. 부모, 남편, 자녀, 이웃까지...


애를 썼는데도 때로는 오해가 생기고, 뜻하지 않는 실수를 하게 되기도 한다. 오해와 실수를 즉시 인정하고 사과하고 풀어가려 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관점이 다르고, 전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배려의 옷을 잘못 입으면 상처를 남긴다.


오해 (誤解)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
실수(失手)
1. 조심하지 아니하여 잘못함. 또는 그런 행위.
2. 말이나 행동이 예의에 벗어남. 또는 그런 말이나 행동. 상대의 양해를 구하는 인사로 쓰는 경우가 많다.
상처(傷處)
1. 몸을 다쳐서 부상을 입은 자리.
2. 피해를 입은 흔적.


오해와 실수로 인해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되도록 잘못을 알았을 때 빨리 인정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를 먹으며 조금 유연해질 때도 됐는데 나는 햇수로만 나이를 먹나 보다.



 

고작 세탁기 하나 바꿨을 뿐인데 마음이 참 요란하다.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는데 그 생이 다하니 폐기될 운명에 처한 나의 세탁기를 보내며, 맞이한 새 식구에 기뻐할 여력이 없는 것을 보면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에도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만 마음 쓰고 내일은 새 식구를 반가이 맞아줘야지.'

라고 내 허전한 마음을 도닥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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