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들쑥날쑥 널을 뛰는 날이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란 녀석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널뛰기를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하다. 갱년기를 핑계 삼아 탓을 해 보지만 사실 그냥 마음 탓이 맞다.
다른 날과 비슷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생각이 많은 날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오랜 불면증으로 주치의 선생님께서 정기검진을 가면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주신다. 되도록 약물의 도움 없이 잠을 청하지만 생각이 많아지는 날은 불면증상이 심해지기에 어제는 부러 약을 챙겨 먹었었다. 그런 날은 늦잠이라도 늘어지게 자면 좋으련만 오랜 습관 탓에 휴일도 주말도 상관없이 늘 일어나던 시간에 눈이 떠진다. 거실 쪽에서는 새벽잠이 없는 동글이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아이의 아침상을 차려 줘야겠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몸을 침대에 붙들어 보았다.
호수공원 산책길에 핀 보랏빛 들꽃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제 할 일을 하고 나야 마음이 편할 테니 힘을 내 보았다. 잡생각으로 몸을 잡아끄는 마음과 할일 하라고 몸을 일으키는 마음이 서로 부대꼈다. 복잡한 심경 뒤로 가족의 밥상을 챙겨야 하는 마음이 오늘의 "승"이다. 그렇게 나물 비빔밥 만들기를 시작했다. 가족들은 맛있게 아침 식사를 마쳤고 내게는 느긋한 시간이 허락되었다. 침대에 몸을 뉘일까 하다가 핸드폰 하나 들고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
하늘이 제일 처음 맞아주었다. 청명한 하늘이 나를 품으며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한 달쯤 뒤면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농익은 초록이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 주었다.홀로 나서는 산책은 오랜만이다. 코로나와 아이들 방학을 핑계로 너무 집에만 머물렀나 보다. 오늘의 마음 앓이는 바깥 구경을 너무 안 해서 생긴 답답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놀이터, 잔디밭, 아름드리 밤나무, 푸른 하늘
놀이터, 잔디밭, 아름드리 밤나무, 푸른 하늘... 선물 같은 풍경이 말을 건넨다.
"로운아~ 힘드니? 힘들어도 괜찮아. 눈물이 나면 울어도 돼. 아무도 없기는? 우리가 있잖아."
말을 건네며 따스한 햇살이 발등을 데워주었다. 한결 더 푸르게 초록을 빛내며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뛰노는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가 내게 말을 건넸다.
"로운아~ 어른이 되었다고 놀이터에서 못 놀라는 법 있니? 동심으로 들어와 보렴."
쑥스럽게 유아용 미끄럼틀에도 올라 보았다. 스프링 말에 앉아 몸을 맡겨보니 무겁다고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혼자라고 느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삐걱대는 그 소리가 눈물겹게도 위로가 되었다.
나무 그루터기
놀이터를 돌아나와 산책로를 따라가니 나이테를 두른 그루터기가 있다. 지난해 태풍으로 나무들이 많이 쓰러졌었는데 혹시 그때 가족을 잃었던 걸까? 말을 건네 보았다.
"밑동만 남아 외롭진 않아?"
"괜찮아. 너처럼 가끔은 사진도 찍어주고 말도 건네주는 친구들이 있거든. 그래도 땅 속은 따뜻하고 깊숙이 제 갈 길로 흩어진 나무뿌리가 있잖니? 뿌리는건강하고둥치가 잘려 나가고 니뭇가지와 열매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죽은 건 아니잖니?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구나. 그렇지. 죽은 건 아니니까 괜찮은 거야. 생이 끝난 것도 아닌데 나는 종일 축 쳐져있었네. 깨달음을 줘서 고마워."
산책로의 나무계단
얕은 야산이지만 도토리나무, 밤나무가 오랜 시간을 지키고 있어서 매 해 열매도 가득가득 열린다. 동글이를 임신했을 때도 매일 걷던 길... 산책길 벗이 된 지도 벌써 11년이 되었다. 곳곳마다 멍석으로 된 길, 황톳길, 나무계단이 있어 작은 야산이지만 요리조리 걷는 재미가 있다.
지나다 쉬어 가라고 곳곳에 마련 해 둔 벤치
한 시간쯤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늘에 앉으니 가을바람이 코끝에 스치는 맛이 기가 막히다. 덥지도 춥지도,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바람결이 말을 걸었다.
"로운아~ 오늘은 왜 마음이 들떴니? 뭐가 마음을 외롭게 했어?"
"응,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별일 일수도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유난히 마음이 울적한 날...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
"그랬구나. 그래서 마음은 좀 나아졌니?"
"실은... 아침부터 밥을 못 먹었어. 배가 고프지 않았거든. 그런데 너희들이 동무가 되어준 덕분에 조금씩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아. 배가고파지는것을 보니 마음이 좀 치료가 된 것 같지?"
"다행이네~ 너만 발걸음을 한다면 나는 늘 이자리에 있어. 알고 있니? 나는 있었는데 네가 나를 안 찾았던 거야."
"그러네? 그러고 보니 힘들 때만 찾아왔구나. 다음에는 기쁠 때도 찾아올게. 오늘 동무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밤나무 숲 사이길
아직은 채 익지 않은 밤송이를 가득이고 진 밤나무 사이를 지나는데 올해는 유난히도 흐드러지게 밤이 가득 열려있었다. 9월이 되면 플래카드가 붙을게다.
밤송이와 도토리를 다람쥐에게 양보해 주세요.
올 해는 작년보다 더 열매가 많아 보였다. 산책삼아 운동하는 분들께 열매를 나눠주고 휘리릭~ 나무 사이를 오가는 청설모의 겨우내 식사가 될 밤송이와도토리다.
사람들은 양심도 없지. 꽁으로 얻은 열매를 한 움큼 주머니에 넣을 만큼만 담아가면 좋을 것을 바구니며 봉투를 챙겨 와 산을 다 옮겨갈 요량으로 열매를 가져간다. 오죽하면 해마다 플래카드가 붙을까...
까실까실 탐스런 밤송이
나무는 가물어도 홍수가 나도 때가 되면 제 기량을 다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바람이 불고 태풍이 일어도, 가물어 땅이 갈라지고 뜨거운 뙤약볕에 나뭇잎이 타들어가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밤나무가 되고 싶다. 조금 억울하고 슬퍼도, 작은 오해의 씨앗이 그간의 애씀마저 모른 채 한대도 태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숲으로 안내하는 산책로
곱게 다져진 땅 위에 질퍽한 흙과 물구덩이로 걷는 이의 옷과 산책하는 마음이 상할까 봐 배려해 둔 멍석 길... 폭식한 멍석 위에 발을 디디면 딱딱한 돌덩이도 말라서 날아 흩뿌려지는 흙먼지도 없어 흐뭇하다. 곳곳에 배려가 가득한 동네 산책길이 어수선하던 마음길도 정돈해주었다.
오늘 만난 하늘과 바람, 놀이터와 그루터기, 밤나무와 도토리나무, 산책길과 계단, 그리고 잠시 쉬게 해 준 벤치까지... 모두 나에게 고마운 벗들이 되어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