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Sep 18. 2021

듣기만 해도 울컥하는 이름...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나이가 들고 보니 「아버지」 이름 석자에도 코끝이 아려온다.


젊은 날의 아버지는 강직하고 올곧은,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분이셨다. 권위적이고 엄격한 아버지는 말 수도 없으셔서 집 안에서 아버지의 레이다에 걸릴 만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 음성을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국민학교 4학년 가을. 엄마의 고향 전라남도 해남에 사셨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5일을 보내고 어머니는 고향에 남으시고 아버지와 둘이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우등버스에 올랐다. 요즘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있어서 오가는 길이 좋아졌다. 그런데 예전에는 전라도 가는 길이 국도를 타거나 고속도로를 돌아서 다니는 방법밖에 없어서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데 8시간이 넘게 걸렸다. 워낙 차멀미를 많이 하던 나는 고속버스 안에서 자다깨기를 반복하며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버스에서 내내 홀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아버지는 말없이 책만 읽으셨다. 아버지가 무서웠던 나도 아버지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고속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서자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10분 정차합니다. 화장실 다녀오실 분들은 다녀오시고, 요기를 하실 분은 시간이 짧으니 빨리 드시고 시간 안에 빨리 오시기 바랍니다."


버스 내 승객들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멀뚱이 자리를 지키고 앉았는데 아버지께서


"배 고프냐?"


고갯짓도 안 하시고 읽던 책을 계속 읽으시며 한 마디 무심하게 던지셨다.


"아니요."

"그래, 그럼 그냥 가자."


아버지와 나눈 세 마디가 8시간의 여정 동안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아버지께서 세미나로 집을 며칠 비우시면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나의 세상이 도래했다. 청소도 빨래도 밥도... 자유롭게 먹고 치우지 않아도 됐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 날 밤이 되면 세 식구는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미뤄뒀던 집안일을 하느라 각개전투에 나간 군인들처럼 일사천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직 전까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완벽한(?) 청소를 마치고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 입성!!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현관 앞에 놓인 신발의 각도까지 체크하신다. (아버지가 군인은 아니시다.)


"OOO! OOO! 나왓!!"

"예. 아버지."

"현관은 그 집안의 얼굴이라고 몇 번이고 얘기했었지? 신발이 이렇게 흐트러져 있으면 가지런히 모아서 단정하게 둬야지, 신발이 한 짝 씩 날아다니면 되겠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 마음에 쏙 들도록 단정하게 신발을 놓으니 곁에 서 있던 오빠가 눈짓으로 '너, 그거 정리 안 했었어? 현관을 제일 먼저 했어야지.' 눈썹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눈을 크게 떴다 째려봤다하며 무언의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집안으로 들어서며 손가락으로 창틀도 쓰~윽~~ 쓸어 넘기시며 먼지를 체크하시고 우리는 뒤 따르며 '제발, 제발... 아무 말씀 없이 서재까지... 바로, 바로, 바로....!'


"며칠 동안 어머니 말씀 잘 들었고?"

"예!!"


우리는 아버지의 검열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럼 됐다."


그렇게 아버지가 서재로 들어가시면 어머니와 우리 남매는  '휴~~~'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어냈다.




대학을 다니던 때 나의 통금 시간은 해지기 전까지였다. 하절기는 괜찮지만 동절기는 6시만 되어도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에 동절기의 통금시간은 6시가 되는 셈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던 나는 몰래바이트를 많이 했었다. 과외, 롯**아, 이탈리안 레스토랑 주방 알바에 사무대행업체 워드 알바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무렵 등장한 피자헛과 미스터피자, 그리고 이탈리안 레스토랑 화덕피자의 맛은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을 통틀어 단연 엄지 척! 하는 맛이었고, 피자를 원 없이 먹고 싶은 욕심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물론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를 해서 차라리 장학금을 받는 게 더 낫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자급자족 용돈벌이를 하고픈 마음에 몰래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프랜차이즈 피자집 아르바이트를 선택할 것을 더 맛있는 피자를 먹고 싶어 선택한 레스토랑에서는 중식으로 피자를 주지 않았다.


'헐... ㅠ.ㅠ' 사장님도 매장에서 식사를 하셔야 하기에 나는 원들과 함께 밥을 중식으로 먹었다. 한 달에 한 번, 전체 회식이 있을 때에만 레스토랑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는데 회식을 매장 정리 마친 후 밤 10시가 넘어서 했었다. '안돼~~~. 나는 통금 시간이 6시라고...' 통금시간 때문에 일하는 동안 그 집 피자를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 (나는 밥을 잘한다는 이유로 주방 알바 2일 차부터 20인분 밥과 국, 반찬을 만들었었다.) 피자집을 그만둔 후에 갈 수도 있었지만 일하던 곳에 가서 돈 주고 사 먹게 되지 않았다. 결국 유명했던 그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다.




사무대행 워드 알바를 할 때,

사장님께서 전체 회식을 8시에 할 테니 참석하고 가라고 하셨다. 나를 위한 배려였고 1시간만 앉아있다가 가자 싶어 회식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 소리가 나지 않게 슬그머니 열고, 발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들어서는데 낯익은 기둥 하나가 떡~ 허니 있었다. 「아버지」


"어디 갔다가 이 시간에 들어와! 여자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깜깜해지도록 돌아다니니! 이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다녔어? 이리 따라와!!"


아버지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고 그대로 나는 아버지께 이끌리어 교회 장의자에 앉혀졌다.


"거기 앉거라.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지금 이 시간, 집을 나선 후부터 들어올 때까지 하루 동안 했던 일을 시간의 흐름대로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해봐."


"아침에 4시 반에 일어나서 5시에 새벽기도를 갔고, 7시에 아침밥을 먹고,...  9시에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2시에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너 아빠가 아르바이트하지 말라고 분명 이야기했을 텐데..."


아버지의 연설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내린 처벌...


"아버지도 곁에서 기도를 할 테니, 너도 기도하거라. 소리를 내서 기도해. 아버지가 됐다고 할 때까지 회계의 기도를 드리자."


나는 그날 2시간 동안 기도를 했다. 자다 깨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아버지께서 젊으셨을 때 우리 집은 늘 살얼음판이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아버지께서 험한 말을 사용하시거나 매를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어쩌면 아버지와 친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어렵고 불편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삶은 어른으로서 한치도 흐트러짐이 없으셨고, 부지런하셨으며, 정직하셨다. 바깥일로 분주하여 가족과 머무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아버지와 친해질 짬이 없었을 뿐 여느 위인전의 위인보다 멋지셨다. 하지만 사적인 가족 외식을 한 것이 대학교 들어가서였으니 아버지와 함께 쌓은 어릴 적 추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호령하던 아버지께서 할아버지가 되셨다. 영영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기운 짱짱하고 기백이 넘치던 아버지로 계속 계실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아버지의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40년 넘게 서재에만 머무셔서 등과 어개는 안쪽으로 굽으셨고, 글씨를 너무 많이 써서인지 손가락 마디는 기형으로 변했다. 숨 쉴 틈 없이 부지런한 성품 탓에 살은 계속 빠지고 그래서인지 원래 갖고 있던 정장을 입어도 남의 옷 입은 것처럼 커 보인다.


거친 텃밭일을 시작하고,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은 정직하다며 사계절 추위와 더위도 상관없이 매일 밭으로 향하신다. 아버지가 키운 밭 식물들은 잘 자란다. 어머니의 핵폭탄급 조언(아버지 입장에서는 간섭) 덕분이다.  


사실 아버지는 밭일에 서투시다. 어릴 때부터 서울살이를 하신 탓에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셨고, 책 읽고 글 쓰는 일 밖에 안 해보셔서 매사 서투시다. 그런데 너무 부지런하셔서 필요 이상으로 앞서 움직이신다. 물도 너무 많이 주시고 그냥 둬야 할 것들을 계속 만지셔서 식물들이 몸살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에 비하면 일머리가 좋으신 어머니는 아버지 하시는 일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잔소리라도 늘어놓을라치면 일하는 사람이 주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호령이 먼저 온다. 그도 그럴 것이 디스크 수술을 4번이나 하신 어머니께서 많이 움직이시면 탈이나기에 어머니의 잔소리 끝에는 아버지가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 숙제가 생긴다. 투닥투닥 매일같이 부딪치면서도 50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두 분의 언어가 투박해서이지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닌 것 같다.




젊을 때부터 사업수완이 좋으셨던 어머니는 당차고 지혜롭다. 어딜 가시든 '핵인싸',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시고, 절대 손해 볼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믿음이 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일을 놓기 전까지 은행 한 번도 홀로 가보시지 않을 만큼 집안일에 문외한이셨다. 한참 창창하셨을 때는 어머니가 집을 비우시면 와서 밥을 차려줄 때까지 굶고 기다리셨을 정도였다. 가끔씩 은행 갈 일이 생기면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었다. 그나마 은행에 가는 일은 1년에 두 번 결혼기념일과 어머니 생신날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으니 아버지는 정작 사는 데 불편함이 없으셨을 듯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드리러 엄마 몰래 가셨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실 때 나를 데리고 가셨다.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른다. 엄마가 들리지 않을 눈짓과 몸짓으로 '오늘 역곡 가자.'는 사인을 보내시면 나는 소리 없이 끄덕였다. 할머니에게서 자란 나는 역곡에 가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를 돕는 것도 좋고 할머니를 뵙는 것도 좋으니 일석이조였다.


할머니 집 다녀오고 며칠 지나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다투셨다. 어머니는 말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용돈을 드리기 원하셨고, 아버지는 아버지 주고픈 만큼 어머니의 허락 없이 드리고 싶으셨던 것 같다.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이 나 몰래 시댁을 챙기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기는 하다. 살아보고 겪어 본 만큼 이해가 되는 것이 맞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서툰 아버지는 늘 딸 가족을 기다리신다. 아들 가족은 먼 타국에 있어 보고 싶다고 볼 수 없으니 하나 남은 딸 가족이라도 자주 보고픈 마음을 갖고 계신다. 나도 알고는 있다. 그런데 사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네 식구의 삶도 아이들 연령 편차가 많이 나서 서로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고, 사업을 하는 남편의 시간도 오락가락이다. 가끔 혼자라도 다녀오긴 하지만 내심 손주들을 기다리시고 사위 안부를 물으신다. 어쩌다 온 식구 찾가간다 연락이라도 하면 보여주고 자랑할 거리 찾으시느라 분주하시다.


텃밭 가득 배추를 심고도 집 옥상에 화분마다 배추를 심어 키우신다. 새벽부터 밭에 나가셔서 밤 7~8시나 되어야 집에 오시면서 옥상에 꾸려놓은 밭의 규모도 만만치가 않다. 사위와 손주들에게 잘 크고 있는 배추를 자랑하고 싶으셔서 온 식구 불러 모아 자랑 일색이시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저리도 뿌듯하실까 싶지만 아버지 사랑을 듬뿍 먹고 자라는 배추는 당도가 최고다. 매 해 김장을 책임지는 아버지의 배추들은 사랑을 먹고 쑥쑥 자라고 있는 중이다.



너무 열심히 사셔서 늘 걱정인데 정작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으시다. 아버지를 도와드리려 한 사람이라도 밭에 가면 품삯의 곱절의 곱절은 지출된다. 그저 아버지를 찾아와 준 것이 고맙고 반가워서 손님맞이 하시느라 덩실덩실 어깨춤이 나오시나 보다. 밥 사주고, 대접하느라 여념이 없으시고 가시는 걸음 허전하지 않도록 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종류별로 차에 바리바리 실어주신다. 젊을 때 그리 무섭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남들은 '어머니'이름이 나오면 눈물이 난다는데 나는 이상하게도 '아버지' 이름 석자에 울컥한다. 글을 쓰려고 사진을 찾으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은 가득한데 아버지 사진은 몇 장 없었다.


얼마 전 친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유품을 정리하다 보디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없어서 영정사진 한 장 찾는 것도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친구는


"건강하게 잘 지내실 때 사진 많이 찍어둬. 장례 마치고 아버지 이야기하면서 추억해보려고 앨범을 펼쳤는데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더라. 자식이 다섯인데 자식들 핸드폰에도 아버지 아진은 없었어. 아버지 핸드폰을 열어보니 찍어둔 사진 속에 아버지는 없고 죄다 자식들과 손주들 사진만 있더라. 동영상이 몇 개 있길래 봤더니 손주들 찍어주시느라 '여기 봐.' 하시는 음성만 겨우 남아있더라. 우리 모두 그것을 보며 모두 불효자들만 있구나 했어. 그러니 너도 부모님 살아계실 때 사진 많이 찍어두고, 되도록 동영상을 많이 남겨둬."


친구의 말이 남의 말 같지 않았다. 내 파일에도 아버지가 안 계셨다. 아버지만 안 계신 게 아니라 남편 사진도 거의 없었다. 나들이 가족사진에 아이 둘과 나만 있고 남편은 없었다. 사진을 훑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 같다.


금번 명절에는 한적한 공원이라도 나가서 아버지와 남편의 사진을 좀 찍어야겠다. 지나가는 분들께 말 붙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만 부탁해서도 찍고, 삼각대를 이용해서도 찍어야겠다. 글을 쓰기 시작하니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된다. 섬긴다고 애썼지만 여전히 부모 마음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식임에 틀림없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조금 더 잘하며 살아야겠다.





가족과 함께 많이 웃는 한가위를 맞이하고픈 로운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누이' 지칭은 '시누이'도 싫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