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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Sep 17. 2021

"나이 50에도 녹색어머니를 선다고?"

"50은 아니지만 늦둥이 아들이 있으니 녹색도 서고 뽀로로도 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멀리 이사 갔던 친구가 다녀갔다. 친구만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좋다. '그냥'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친구가 좋은 이유에 대해서 '그냥'이라고 붙이는 것은 정말 이유가 없어서다. 내가 '그냥'이라고 붙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하나는 '남편'이고 하나는 '친구'이다. 이유가 너무 많아서 '그냥'인지, 이유를 댈 수가 없어서 '그냥'인지는 나도 모른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이다.


건강염려증이 심한 나는 자유롭게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복잡한 곳에 가면 불안이 올라와 공항 증세가 생긴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도 조금은 있었 증상이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심해진 것은 맞다. 그 전에도 유행병이 유난해지는 환절기가 되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유난스럽게 칩거를 했으니 코로나만 핑계 댈 수는 없다.


얼마 전 스트레스가 될 만한 작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 한 달이 다 돼가도록 흉통이 멈추지 않았다. 조였다 풀렸다 하며 잠을 자는 중에도 흉통이 느껴져 숙면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딸아이의 짙은 잔소리를 핑계 삼아 가기 싫은 병원에 갔다.


"로운님, 정기진료 다녀 가신 지 일주일 정도 되었는데 왜 저를 만나러 이렇게 일찍 오셨을까요?"

선생님은 나를 만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벌써 10년째 다니고 있는 병원이라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불쑥 찾아가면 뭔가 심상찮아서 왔으리라 직감적으로 느끼시는 듯하다.

"지난주 진료 때도 불편하기는 했는데, 이러다 말겠지 하고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흉통이 예정보다 심해지고 최근 2주 정도는 잠을 방해할 정도여서요."
"음... 좋은 현상이네요."
"네?"
"로운님의 말씀은 가끔 조이듯 아픈 게 아니라 24시간 계속해서 아프다는 거잖아요?"
"네.'
"그러니까 좋은 증상이라는 거예요. 심장에 무리가 돼서 통증이 생기면 갑자기 1~2분 정도 숨도 못 쉬게 고통스럽다가 이내 말짱해지거든요? 근데 그 잠깐의 통증이 너무 지독해서 아마 참지 못하셨을 거예요. 2주 동안 많이 아프셨지만 견딜 만큼 아프셨으니까 24시간 내내 아프면서도 이제야 오신 거잖아요. 검사는 해 보겠지만 큰 일은 없을 거예요."

선생님의 처방에 따라 심전도 검사를 마치고 다시 진료실로 왔다.

"결과지를 보니까 역시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네요.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인데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이 약을 먹는다고 한번 먹고 당장 좋아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일주일쯤 먹으면 조금씩 편안해지실 거예요. 3주 뒤에 우리 약속이 있으니까 3주 분을 드릴 테니 드셔 보시고 3주 뒤에 봅시다."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 집에 돌아와서 보니 '공황장애' 치료제였다. 마음을 만지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서 정작 내 마음은 늘 이모양이다. 타인의 마음은 잘 어루만져주고 치료해주면서 내 마음 다루는 것은 늘 미숙해서 꼭 병원을 찾도록 만드는 나를 보며 꿀밤이라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를 찾은 것 같다. 친구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이 나를 맞아주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친구를 만날 때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서로 만만하거나 예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만나면 편하고 헤어지면 보고 싶은 마음이 비슷하다는 것이 마냥 좋을 뿐이다.


친구가 발걸음을 하려면 하루를 비워야 한다. 서울로 이사 간 친구가 밀리는 시간을 피해서 다녀가려면 미리 약속을 정해서 만나야하기 때문이다. 이 점도 정말 고맙다. 먼 길을 '나를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해 주는 것도 너무 고맙다. 1999년에 면허를 취득해서 무사고로 운전을 하고 있지만 둘째를 낳고 키우면서 생활 반경이 좁아졌다. 거리가 멀거나 복잡한 서울을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코로나 이후 한 번도 지하철과 버스를 탄 적이 없다. 결국 서울에 사적인 이유로 나간 적이 없는 거다.


나의 이런 불안을 잘 아는 친구는 내가 서울로 나갈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당연히 자기가 오기를 자처하고 만나면 편하게 거의 집에서 해결한다. 오랜만에 움직인 거니 맛있는 것도 먹고, 산책도 하며, 새로 생긴 창고형 카페도 둘러보면 좋으련만 나도 친구도 당연스레 집에서 만난다. 그 모든 배려가 고맙고 '그냥' 좋은 이유가 됐다.




"언니, 내일은 뭐해요?"
"내일 아침에 녹색어머니 봉사해야 해!"
"어머~ 녹색어머니? ㅎㅎㅎ 그렇구나. 언니는 동글이가 아직 어려서 녹색을 서야 하는구나. 이게 언제 적에 듣던 말이야? ㅋㅋㅋ"(친구의 아이들은 고1, 고2 연년생이다.)
"그래. 난 아직 녹색도 서고 뽀로로도 본다. 왜? 뽀로로 18년 봐 봤어? ㅋㅋㅋ"
"그러게. 언니라서 깜박 잊고 있었네. 아직은 녹색도 열심히 서야지..."


그렇다. 난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을 둔 초등학생 엄마다.


한 달 전부터 녹색어머니 안내장과 요일별 당번 명단, 서야 할 위치가 적힌 e알리미가 왔었고, 매일 반대표 맘에게서 다음날의 당번을 알려주는 단체톡이 울린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깜박 잊을 수도 있는 게 주부다. 적어도 난 그렇다. 최근 들어 깜박 병이 더 심해졌다.


얼마 전에는 큰아이를 데리러 나가야 하는데 안경을 통~ 못 찾겠는 거다. 그래서 온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촉박하고, 땡볕에서 기다릴 아이의 짜증 난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찾는 것을 포기하고 '낮 운전이니 조심조심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승강기에 올랐다. 안경을 찾느라 머리빗을 짬도 없이 분주했기에 머리라도 정돈하려고 승강기에 부착된 거울을 보는데... '아풀싸!!'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서 40분이나 안경 찾아 삼만리로 헤매고 다니며 집을 죄다 어질러두고 늦어진 시간 탓을 하며 신발 신을 짬도 없이 슬리퍼를 끌고 정신없이 나섰는데 쓰고 있을 줄이야...


어느 날은 큰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앵글아, 혹시 엄마 핸드폰 못 봤니? 아무리 찾아도 없어."

"엥? 엄마 그럼 지금 누구 폰으로 전화하는 거야? 분명 [엄마]라고 이름이 떴는데?"

"뭐? 우하하하... 나 요즘 왜 이러니? 이거 맞아. 내 전화."

이쯤 되면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간 게 맞다.  




혹시나 알람을 놓쳐 민폐를 끼칠까, 정신없는 엄마가 될까, 싶어서 시간 차를 두고 알람을 3개나 맞춰두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아침상을 챙겨주고, 동글이 등교 준비를 도왔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개인 물병에 얼음물을 채워 가방에 넣어주고 거듭 당부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분주해지면 나타나는 증상인데, 나도 모르게 자꾸 할머니 같아진다. 슬프다.)


"동글아. 엄마가 8시 10분에 집에서 나갈 거야. 너는 8시 30분에 집에서 나오면 돼. 그러니까 엄마가 있을 때 학교 갈 준비를 다 마쳐주면 안 되겠니?"

"아니? 난 8시 15분부터 준비할 거야."

"왜? 엄마 있을 때 준비하면 엄마가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나 혼자 준비하고 갈 수 있어. 엄마는 그냥 가!"

"그럼, 씻기라도 좀 하지?"

"나 지금 하는 게(게임 아이템 보상받기 중) 있어서 이거 하고 씻을 거야."


내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인데 동글이에게는 중요한 일이라(아침이면 마치 의식을 치르듯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모습이다.) 그냥 두고 나왔다. 부지런히 학교에 도착해서 열체크와 사인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물품을 챙겨 배정받은 위치로 향했다.


녹색어머니 조끼, 전자호루라기, 안전깃발



격 주 등교라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이전보다 많이 줄었고, 아이들이 정지선을 잘 지켜줘서 단속할 일도 없었다. 횡단보도를 가득 메우며 떼 지어 가던 아이들의 행렬이 사라지니 일상의 변화가 여실히 느껴졌다.



등교하는 아이들



오늘 배정받은 위치가 아파트에서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인원이 적어서 일 수도 있지만, 전교생이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어서 몇 명 안 되는 것 같아 아쉽고 허전함이 느껴졌다. 녹색 봉사를 하는 30분의 시간 동안 날씨도 맑고, 바람도 선선해서 아이들이 활동하기 참으로 좋은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집 안에서 원격수업을 받는 아이들도 딱하고, 마스크를 쓰고 반나절을 학교에서 친구와 대화도 없이 생활하는 아이들도 짠하게 느껴졌다.


봉사를 마치고 물품 반납을 위해 학교로 돌아가니 이미 수업이 시작되어 학교 전체가 조용했다. 마스크를 쓰고 제한된 환경에서 수업을 받아도 동글이는 학교에 가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한다. 학교에 가는 것보다 방학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었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아이들이 살아 숨 쉬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는 학교의 일상이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가을의 높고 맑은 하늘



맑은 하늘보다 더 맑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행복한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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