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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Nov 10. 2021

고2 딸과의 산책 '학교급식'

밥은 안 먹어도 급식 줄은 전교 1등

일요일 오전,

앵글이가 다가와 데이트 신청을 합니다.


엄마, 오늘이 마지막 가을이래. 오늘은 공원으로 산책 갈까?

오늘이 입동이지? 그러네, 이젠 겨울이네.

오늘 지나면 내일 비가 많이 올 거래. 비 오연 이제 추워진다는데?

내일 비와? 그럼 단풍이 다 떨어지겠네. 그래. 가자~ 호수공원으로...


앵글이의 데이트 신청으로 함께 호수공원 산책길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앵글이의 수다방이 열리겠죠?


아시나요? 딸과 외출을 하려면 준비할 시간을 많이 줘야 해요. 나가는 장소마다 다른데 산책은 3~40분, 쇼핑몰은 1~1:30, 가족 외출은 1:30~2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래서 즉흥적인 데이트 신청이어도 출발 시간을 미리 약속해야 해요. 현재 시각 11시!


몇 시에 나갈까?

글쎄, 몇 시가 좋아?

2시! 어때?

난, 좋아


우리의 오늘 약속 시간은 2시 출발로 정해졌네요. 그리고 한 마디 더!!


준비 다 되면 얘기 해~

응, 엄마!


가족 외출 시에도 앵글이에게 미리 약속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배려입니다. 남자 두 분의 준비 시간은 3분이면 충분하거든요. '나갈까?' 물어보는 순간 현관에서 대기! 재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앵글이의 OK사인 후 준비시키면 온도차가 딱 맞아요. 오늘 앵글이와 저는 호수 산책, 동글이와 아빠는 놀이터에서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습니다.



앵글이의 이야기보따리 1.


급식은 아직도 안 먹니?

하윤이가 이제 등교 시작해서 목요일부터 먹었어.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하윤이가 3주를 학교에 못 왔잖아. 외로워서 힘들다고 매일 전화해달라고 슬퍼하면서 친구들이 자기 얼굴 잊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더니 그냥 집에 있던 게 나았다며 학교 오는 게 더 피곤하대.

너무 오래 쉬었잖아. 리듬이 다 깨졌겠지.

방에서만 있었대. 3주 동안 거실에 한 번도 안 나왔었다더라고.

그런 걸 보면 백신을 맞는 것이 더 낫겠네. 미접종자 격리기간이 너무 길잖아. 하윤이는 이제 백신 맞아야겠네?

그렇지? 하윤이만 백신 안 맞아서 혼자 3주를 격리했잖아. 엄청 힘들었지... 다음 주에는 백신 맞느라고 또 결석하게 되겠지?


※ 하윤이는 부모님이 직장 내 감염으로 생활치료센터에 가시고 하윤이는 자가 격리되었어요. 접종 완료 한 오빠는 정상 등교했지만 미접종이었던 하윤이만 3주 격리되어 등교를 못 했죠. 요즘에는 감염이 되면 열흘 간 치료 후 일상 복귀되는데 미접종자는 세 번의 검사와 자가격리 기간을 가집니다. 감염자보다 격리자가 더 고생이죠.



앵글이의 이야기보따리 2.


엄마. 내가 급식 줄 중학교 3년 내내 1등이었잖아?

그게 뭐라고 목숨 걸고 뛰어.

생각 나? 복도에서 친구랑 부딪쳐서 날아갔던 거?

생각나지. 보건실 전화받고 얼마나 놀라고 황당하던지...

내가 3년 내내 1등이었는데 그날만 1등 못했잖아.

교실이 4층이었는데 급식실까지 어떻게 1등을 하니?

(중학교 때 앵글이 키 150cm, 몸무게 42kg / 급식실 옆 건물 1층)

나랑 경쟁하던 남자애가 있었거든. 키가 180이 넘는 앤데 걔가 '야! 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냐?'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비법을 알려줬지.

비법이 있어?

엄마, 급식 줄 1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공부로 전교 1등을 3년 내내 하지는 못했지만, 급식 줄 1등은 3년 내내 했다니까? 급식 줄 1등은 내 자존심 같은 거야.

무슨 그런 자존심을 세워? 밥도 잘 안 먹으면서...

그렇지. 줄 서기 1등이지, 밥은 거의 안 먹었지.

그래서 비법이 뭔데?

이거 특급 비법이야. 잘 들어봐. 4교시 마칠 때쯤 되면 교실 문을 살짝 열어서 손으로 문을 잡아! 그리고 수업 종이 '땡'하는 순간 문을 '팍~!!' 밀고 냅다 튀어 나가서 전속력으로 뛰는 거지. 옆에 남자애가 뛰면서 '오~ 겁나 빠른데?'라고 했어.

그럼, 계단은? 그 짧은 다리로 계단 두 칸씩 뛰어?

엄마, 내가 두 칸씩 뛰면 난 이미 다발성 골절로 병원각이지. 그냥 우다다다다 한 칸씩 종종종 뛰어!

야~ 상상도가 그려졌어. 엄청 웃겨. 개미만 한 애가 계단을 종종 뛰는 거 너무 웃기지 않니?

그래도 난, 1등을 놓치지 않았지. 우리 학교 전설이었어. 내가...

그러니 사고가 나지. 엄마는 너 정말 어떻게 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아니?

아니 그날 뛰는데 나보다 두 배나 더 큰 애랑 진짜 살짝 부딪쳤거든? 진짜 살짝이었어. 근데 내가 복도 끝까지 날아간 거야. 정신 차리고 보니 애들이 빙 둘러서 어떡하냐고 119 불러야 하냐고 난리가 났었어. 일어나려고 하는데 팔꿈치도 엄청 아프고 못 일어나겠더라고...

너 사고 났다는 전화받고 놀랐다가 급식실 1등 하겠다고 뛰어가다 굴렀다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래도 그건 포기 못했지. 내가 3년 동안 그날 빼고 1등을 지켰어. 내 자존심 같은 거야.


※ 앵글이는 밥을 잘 안 먹습니다. 급식은 거의 먹은 날을 손꼽죠. 그런데 줄 서기에 목숨 거는 앵글이... 진짜 딸이지만 신기한 발상 아닌가요? 남편이 가끔 8차원쯤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작은 머리에 무슨 창의적인 사고들이 들어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앵글이의 이야기보따리 3.


엄마, 나 요즘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안 놀잖아. 말도 잘 안 하고 내 자리에 그냥 앉아있거든?

왜?

한번 수다 떨기 시작하면 학교에서 공부는 끝이야.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 심심하거나 외롭진 않고?

뭐... 괜찮아. 근데 되게 신기한 게 재수 없다고 아무도 나한테 신경 안쓸 것 같았거든? 내가 걱정을 좀 했었단 말이야.

응.

그런데 애들이 내쪽으로 와. 와서 할 말하고 또 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얘기하고 싶으면 다가와서 하고 별로 안 싫어해. 그동안 내가 잘살았나 봐.

네가 중간고사 망쳐서 가만있는 줄 알겠지.

응. 그렇긴 하지. 현타가 와가지고... 애들도 막 외서 괜찮냐고 묻더니 계속 얌전히 있으니까 별로 신경 안 써. 1년만 이렇게 살아보려고...

괜찮겠어?

나 급식도 잘 안 먹잖아. 점심시간 되면 종 치자마자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오거든. 매일 1시간씩 모여서 1년이면 엄청 긴 시간이더라고. 의미 없는 수다에 시간 쓰기 아까워서... 학교에서 알차게 시간 쓰니까 엄마랑 산책도 하고 좋잖아?

아이코... 그러셔요? 엄마랑 산책도 해주시고 감개무량이네요? ㅎㅎ 그런데 계속 점심 안 먹어도 괜찮아?

점심을 계속 안 먹으니까 학교에서는 배가 안 고파. 그리고 6, 7교시에 졸리지 않아서 좋아. 전에는 너무 졸려서 스텐딩 책상에서 서서 수업받았거든. 밥을 안 먹으니까 안 졸리고 집중도 잘 돼. 계속 안 먹었더니 이제 적응이 됐는지 괜찮은 것 같아.


단체 급식은 대체로 맛이 없습니다.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고, 정말 건강한 몇 가지 재료로 맛을 내거든요. 한식 조리에 사용하는 조미료는, 소금, 된장, 간장, 고춧가루, 고추장, 참기름, 깨, 후추 정도가 전부입니다. 10년 전쯤 한식조리사 과정에 등록해서 수업을 받는데 강사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리사는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양소에 맞춰, 위생적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헉~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시험 볼 때 나도 모르게 남은 재료를 입으로 가져가면 그 자리에서 탈락입니다. 위생 점수가 워낙 높기 때문이죠. 조리 수업을 받을 때에도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정해진 양만 넣어서 예쁘게 담아 검사를 받으면 됩니다.
 
앵글이의 말이,

"엄마, 학교 급식을 생각해 봤는데... 영양사 선생님이 주부인 학교는 밥이 조금 맛있어. 아무래도 엄마 마음이 들어가니까 아이들이 조금 더 맛있게 먹으라고 간도 조금 더 하시고, 메뉴도 우리들 좋아하는 것으로 하시는 것 같아. 그런데 미혼 선생님이 영양사인 학교는 맛이 정말 없어. 정말 레시피대로만 만들어서 그런가 봐."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 급식은 어때? 맛있어?"
"아니, 맛없어! 완전... 그래서 그냥 안 먹으려고..."

아이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 씁쓸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 하지만 이것은 앵글이 개인의 생각입니다. 잘 먹는 아이들은 어떤 메뉴가 나와도 잘 먹습니다. 앵글이는 입이 짧고 편식이 많은 편이라 어릴 때부터 119에 실려갈 만큼 음식에 관심이 없던 아이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영양사님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함께 걷다 보니 날이 어둑어둑 해 졌습니다. 가을은 낮도 밤도 아름답습니다. 가로등 사이로 비치는 단풍의 색도 아름답네요. 어두워진 하늘을 카메라로 담으면 그래도 푸른빛이 남아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 삶의 여유가 생긴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2시간을 걷는 동안 이야기 주제가 스무 번은 바뀐 것 같습니다. 기억도 다 못할 정도예요.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앵글이와 산책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7살 때부터였으니까 12년째 함께 산책을 하고 있네요. 7살에 산책하며 먹었던 아이스크림 가게 위치와 함께 먹은 망고 아이스크림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고등학생 시기를 잘 거쳐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니 이제 정말 고3이 코 앞까지 왔습니다. 앵글이도 불안하겠지요. 요즘 부쩍 잘 먹지 않고 소화도 잘 못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대신 공부해서 머릿속에 넣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대신 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곁에서 함께 이야기하면서 맘껏 수다 떨며 가슴속 답답함이라도 털어내길 바라는 엄마 마음입니다.



 오늘도 아이와 함께 크는 로운입니다.





  


동글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급식

※ 학교가 인생 맛집이라는 동글이... *^^*

앵글이는 왜 안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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