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Oct 23. 2021

고2 딸의 카톡 "1교시만 하고 조퇴할께요!"

수험생 딸과의 일상적인 수다

아침 09:02분! 앵글이에게서 카톡이 들어옵니다.

조퇴를 한다고 하네요... 조퇴를 한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제가 다른 엄마들과 다른 점이 이런 점인 듯합니다. 보통은 왜 조퇴를 하려고 하는지 물어보고, 이유가 타당하면 허락을 하고, 타당치 않으면 불허를 하죠. 아파서 조퇴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불허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는 아이가 엄마에게 톡을 보냈다는 것은 '이미 되돌릴 생각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타부타 그에 따른 이유를 달지 않고 일단 아이의 결정을 먼저 따라봅니다.


앵글이도 엄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승낙과 거절의 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내린 결정에 엄마가 수긍할 만한 조건을 맞춰두었을 겁니다. 그리고 연락을 했겠죠. 톡을 보냈다는 것은 허락을 받을 자신이 있다는 판단이 암묵적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고 일단 데리러 가겠다고 OK사인을 보냈습니다.



09:02분이면 아침 조회를 마치고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일 테니 1교시만 하고 하교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어차피 길게 톡을 보내봐야 전달되지 않을 테고, 아이는 (톡 화면을 보시다시피) 마지막 엄마의 메시지는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10시에 교문 앞으로 바로 나와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이번 주 컨디션 난조로 외부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상태라 아이를 데리러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에 가니 아주 발랄한 목소리로 "엄마!! 고마워!" 하며 차에 오르네요. 손에는 A4 출력물 2장이 들려있습니다. 한 장은 다음 주에 맞을 코로나 백신 접종 확인서이고, 한 장은 오늘 조퇴에 대한 '생리 결석계'인 듯합니다.


"오늘 생리결석인 거니?"

"응, 그래서 서류받아왔어."

"핸드폰은 내는 거 아니야? 톡은 어떻게 보냈어?"

"걷고 있을 때 얼른 톡 보내고 냈지. 1교시 끝나자 마자 교무실 가서 서류 받고 폰 받아온거야."

"오늘 수업은 참석 안 해도 괜찮은 거야?"

"중간에 영어 수업이 있기는 한데 나머지는 창체이고, 외부 질서 지도 봉사를 2시간 해야 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생리결석을 냈어."

"그랬구나. 컨디션은 많이 안 좋니?"

"아침부터 안 좋긴 했지만 견딜만하긴 했어. 근데 학교 갔는데 도저히 못 참겠어서 보건실 가서 약 받아서 먹었어. 월요일에 코로나 백신 접종해야 하는데 질서 지도한다고 밖에서 떨다가 열 오르면 백신 못 맞게 될 거 아냐? 그건 싫어서..."

"응. 영어 진도는 수업 안 받아도 혼자 공부하기 괜찮겠어?"

"괜찮아."

"시험 결과 때문에 신경 많이써서 탈 난 것 아니니?"

"내 말이... 친구들이 다들 정시가야겠다고... ㅎㅎ"

"가는 길에 병원 들러서 집에 가자."

"응."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아이의 핸드폰에서 친구들의 문자가 빗발칩니다. 혼자 ㅋㅋㅋ 웃던 앵글이가


"엄마 OO이가 나더러 배신 때리고 도망갔다고 화내는데?"

"그래? 갑자기 쉬는 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니 그렇지."

"응. 내가 나올 때 OO이가 자리에 없었거든. 돌아와 보니 내가 없어져서 황당했나 봐."

"친구들한테 말 안 하고 나왔어?"

"1교시 직전에 생각이 나서 엄마한테 톡 보내 놓고 마치자마자 나왔으니까 애들은 모르지..."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들었을까요? 가끔은 들여다보고 싶어 집니다. 궁금한데 묻고 답해서 모두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놀라운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수업을 제치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앵글이는 신이 났습니다. 이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연신 벙실벙실 수다를 떠는 딸아이에게 어떻게 화를 내겠어요. 그저 웃어야지요...




학교에서 돌아온 앵글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엄마, 음악시간에 라디오 사연 쓰기 수업이 있었어. 사연 쓴 것 중에 3개의 사연을 채택하는 거였거든?"

"그래?"

"그런데 다른 친구들하고 나하고 생각하는 게 너무 달랐어. 내가 쓴 내용이랑 방향이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거든? 선생님도 내 사연은 라디오에서 채택할 수 없을 거래."

"왜?"

"아니, 친구들이 전부 연애 이야기만 쓴 거야. 누가 누구를 사귀고, 누가 누구랑 헤어지고... 죄다 그런 내용으로 쓴 거 있지?"

"너는 어떤 내용으로 썼어?"

"나는...


안녕하세요 저는 18살 아들을 둔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저는 아내와 16살 때부터 8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의 혈액형 검사를 할 일이 있었는데, O형인 줄 알았던 아들이 알고 보니 B형이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둘 다 O형입니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아들은 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아직 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썼지. 친구들이 사연을 듣고 '우와~~~~'하며 반응이 엄청났어. 그런데 선생님이 이 사연은 라디오에 보낼 사연이 아니라 카페에 올려야 될 사연이라며 채택할 수가 없대. ㅋㅋㅋㅋ"

"네가 인터넷 짤로 채널A '애로 부부'같은 프로그램을 보니 그런 사연이 짜졌던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생명과학 시간에 요즘 유전 관련한 진도가 나가고 있거든. 그래서 갑자기 생각이 났던 거야. 유전자에 관해 관심이 많아졌거든."

"암튼, 평범하지 않아..."

"우리 반에서 나처럼 쓴 애가 한 명도 없었어. 아니 어떻게 30명이 넘는 아이들 중 연애 말고 다른 사연을 쓴 친구가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지? 연애 말고는 다른 관심사가 없나 봐..."

"네 나이가 한참 연애에 관심이 많을 때니까 그렇지."

"그래서 결국 내 사연은 채택이 안됐어. 반응은 엄청났는데... ㅋㅋㅋㅋㅋ"




범상치 않은 앵글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달라도 너무 다른 동글이가 떠오릅니다. 동글이가 얼마 전 하교 후 집에 와서,


"엄마, OO이가 나한테 '동글아, 너는 착하고 친절하고 고운 말만 해서 참 좋아. 그런데 나는 ●●이가 더 좋아. 그렇지만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라고 했어."


곁에 있던 앵글이가


"야~ 동글!! 너 차인 거야? 비싼 밥 먹여서 키워놨더니 여자 친구한테 차이기나 하고..."

"앵글아~ 너는 어린 동생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못되게 하니? 위로를 해줘야지."

"위로는 무슨~ 이그... 차이기나 하고..."

"누나! 차인 게 아니고 친구 하자고 한 거야."

"그게 차인 거야.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

"앵글아~ 10살 동생한테 18살짜리 상담을 해주면 어떡하니? 동글이나 엄마는 마음이 여려서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아."

"엄마, 세상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가르쳐줘야 한다니깐?"


어쩜 이리 다를까요? 다행인 것은 동글이가 누나 말에 상처 받지 않는 거랍니다. 평소에도 팩폭을 날리는 누나에게 단련이 된 걸까요?




오늘 앵글이가 조퇴를 하고 주말을 맞이하니 오늘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 앵글이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동글이도 다음 주는 온라인 수업기간이라 두 아이 모두 집에 머물겠네요. 우리 집 풍경은 각자 자기 할 일을 자기 자리에서 잘 해내기에 집에 머문다고 해도 별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점심 한 끼가 늘어나기는 하지만요. 집을 너무 좋아하는 두 아이는 외출을 하자고 조르는 법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외출을 즐기지 않느냐면요...

앵글이의 경우 휴가비를 1/4로 나누어 그 비용을 현금으로 주는 것은 어떨지 제안을 할 정도입니다. 가족 여행으로 추억을 얻을 수는 있지만 집 나가면 고생이고, 번거롭고, 돈도 많이 나가니 최소한의 비용을 네 식구로 나눠 1/4만큼을 떼어 나눠달라는 논리로 설득합니다. 제법 그럴싸해서 아빠는 가끔 '아주 좋은 생각이야!'라며 동조하기도 합니다. 물론 중간에서 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중재를 하지만 이성적인 아이와 감성적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은 분주합니다.


백신 접종을 하고 심한 부작용이 없으면 3일 동안 휴식할 수 있기에 앵글이는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고 수업에 제외되어 마음이 자유로운 모양입니다. 열이 많이 오르거나 근육통과 각종 부작용으로 떠도는 뉴스를 보며 걱정하는 엄마 마음을 앵글이가 알까요?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규제 밖에서의 자유함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주는 평안함이 있으니까요. 보너스로 얻은 시간들이 앵글이에게 선물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선물을 하루 당겨 오늘부터 찬스를 쓰긴 했지만 그 또한 앵글이의 선택이니 존중해주었습니다. 마음이 떠난 학교에 엄마의 거절로 앉아있은들 그 시간이 유익했을까요? 어쩌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얻은 자유로움이 아이의 행복감에 플러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함께 맞장구쳐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세상을 먼저 산 선배로, 수용 가능한 선 안에서 지지해주며 엄마 인 제 역할을 해 봅니다.




아이들과 함께 크는 로운입니다.






















이전 06화 우리집 노래방 "가창오디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