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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Mar 05. 2022

'봄'을 찾아서...

산책

아이들의 등교 3일째.

3개월 만의 자유시간이다. 비록 오전 한 때가 전부이지만 이 시간을 그냥 날려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오랜만에 호수공원 산책이나 해 볼까?' 

생각하며 창 밖의 하늘을 보았다. 이런... 비를 잔뜩 머금은 듯 찌푸린 하늘에 세찬 바람까지 불어 거실 창이 거칠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어떡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나가자!'

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비가 오면 좀 맞으면 돼지.' 

'바람이 불면 옷을 따습게 입으면 돼지.' 

오늘 오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주말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모처럼 맞은 혼자만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 졌다.


두툼하게 패딩점퍼를 걸치고 승강기에 올랐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와 승강기에 올라타는 것까지가 운동의 80%를 좌우한다.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승강기를 타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된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오늘 산책이 물거품 되고 만다. 준비랄 것도 없다. 홀로 걷는 산책길에 몸단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저 옷을 걸치고 나서기만 하면 그뿐이다.


승강기에서 내려 공동현관을 지나 5계단을 내려섰다.

'아뿔싸!'

나만 겨울이다. 분명 집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창문이 거세게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불었고, 하늘은 온통 찌푸린 채 언제고 빗줄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웅크린 날씨였다. 28층에서 내려와 맞은 땅에서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흐린 하늘이 개인 것은 아니지만 역시 3월이었고, 봄맞이 준비가 한창인 듯 온화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주었다.


뚜벅뚜벅 인도를 따라 걷다가 호수공원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한층 가벼워진 옷차림, 한껏 멋을 낸 얼굴과 헤어스타일에서 봄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나는 폴라티에 맨투맨을 덧입고 엉덩이가 살짝 가려진 정도의 패딩까지 걸쳤다. 하물며 하의도 모직 바지다. 온 세상이 봄이라고 소리치는데 나만 홀로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호수공원에 도착해서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얕은 호숫가에는 아직도 얼음이 한창이다. 멀찍이서 바라본 호수에 청둥오리들이 얼음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고 있다. 헤엄을 치는 오리보다 얼음을 지치며 뒤뚱뒤뚱 걷고 있는 오리가 더 많다. 그래도 머리를 물속에 철퍼덕 담그고 무언가를 찾는 오리도 간간이 보이는 것을 보면 물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있긴 있나 보다.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


겨울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철새 떼가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오밀조밀 모여있는 철새가 청둥오리 크기로 보였다. 괜스레 장난기가 올라왔다.

'다가가 볼까?'



철새 떼를 따라 다가가다 깜짝 놀랐다. 크기가 예상외로 커도 너무 컸다. 철새인지 공룡인지 알 수 없을 만한 크기였다. 철새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서 그렇게 클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하늘 위로 떼 지어 나르는 철새를 볼 때와 땅 위에 내려와 걷고 있는 철새를 보는 그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위압적인 크기에 놀라 나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본디의 계획으로는 내가 다가가면 새들이 나를 피해 하늘을 날아오르고 나는 그 장관을 사진 속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도 새들은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레 나쯤은 무시하는 모양새다. 다가오든 말든 무리 지어 걷는 대열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쯤 되니 오기가 났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사람인데 철새들이 날 보고도 의연하게 제 갈길 가는 걸 보니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이런...' 다가갈수록 철새보다 내 가슴이 더 새가슴이다. 한걸음 더 바짝 다가가니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또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세세히 느껴졌다. 저 새들이 내게 일제히 날아들면 내가 뒤로 나자빠지고 말 것만 같았다. 오히려 놀라는 것은 철새가 아닌 나였다. 저 새들이 떼 지어 내쪽으로 날아오를까 겁이 덜컥 났다.


마음속으로는 쫄렸지만 카메라를 들었는데 뭐라도 찍어야지 싶었다. 그래서 영상 모드로 전환해서 철새를 담아보았다. 다섯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가니 그제야 한 마리가 움직였다. 저들만의 싸인이 있는 모양이다. 한 마리가 움직이니 멀찍이 있던 다른 한 마리가 날갯짓을 했다. 두어 마리가 점핑을 하 듯 움직이더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와우~~~'

장관이 펼쳐졌다. 처음 움직였던 한 마리가 리더였던 모양이다. 세차게 날아오른 리더 뒤로 일제히 모든 새들이 날아올랐다.



빙글빙글 날아오르며 대열을 맞춘 철새를 바라보며 그들의 질서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들의 질서를 깨고 함부로 다가선 나는 불청객이다. 마음이 이내 미안해졌다. 놀라게 하거나 거칠게 다가서진 않았지만 말라비틀어진 겨울의 풀숲에 그들의 먹거리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훼방을 논 셈이다. 하늘을 바라보며 새들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이내 리더 새 한 마리가 조금 전 그 자리로 내려앉았다. 리더를 따라 나머지 새들도 하나둘씩 내려앉아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곁에 선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번에 또다시 철새들에게 운동을 시킬 수는 없다. 조용히 뒷걸음치듯 마른 잔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의 기운을 찾아 호수공원을 걸었다. 마른풀 숲 사이로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의 기온이 낮긴 한가보다. 아랫지방보다 3도가량 높고 낮은 우리 동네는 아직 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진으로 담아보려 했던 마른 잎 사이 여린 잡초가 5년 된 핸드폰으로는 담아지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빼꼼히 올라온 들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만 보냈다. 올 해는 확진자가 발생해도 아이들의 등교는 계속된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걱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등교를 막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격주 등교, 1/3 등교로 2년 동안 등교 한 날이 100일 남짓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앵글이와 동글이는 마스크를 벗고 싶지 않다며 3일째 급식 금식을 하고 있다. 동글이는 1시 반이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나마 나은데, 앵글이는 7시부터 5시 반까지 내내 공복이라 걱정이다. 그래도 아이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일단은 지켜보기만 하는 중이다.


꼬박 2년을 집에서만 보내서 일까? 여행을 다녀온 것이 언제였는지 손에 꼽히지도 않을 지경이다. 그래도 오전 몇 시간 산책할 여유를 오랜만에 누려보았다. 코에 바람을 넣고 싶지만 마스크로 가려져 텁텁한 숨결만 느껴졌지만 자연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내 눈이 있어 감사했다.


다가오는 봄이 유난히 기다려지는 것은 자유롭지 못했던 시간에 따른 보상일 수도 있겠다.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설렘의 감정으로 되살아나 오늘 나의 하루를 빛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빛나는 하루를 살아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빛나길 꿈꾸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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