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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Mar 08. 2022

4학년이 된 아들 "엄마! 나 대의원 됐어!"

늦둥이 아들의 생의 첫 감투

지난 금요일 학교에 다녀온 동글이가 스리슬쩍 옆에 앉더니 묻습니다.


"엄마, 내가 대의원이 된다면 어떨 것 같아?"

"대의원?"

"응."

"4학년부터 대의원에 나가?"


세대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대화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의원은 학생회뿐입니다. 앵글이가 초등학교 때에는 5, 6학년 때 대의원 선거를 했었습니다. '요즘은 4학년부터 뽑나?'라는 생각을 하며 물었죠.


"그럼, 작년에도 대의원에 나갔었잖아..."

"아~ 반장, 부반장 말하는 거야?"

"응."

"그걸 요즘에는 대의원이라고 부르니?"


앵글이때는 반장, 부반장을 회장, 부회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동글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현재는 반장, 부반장이라는 명칭이 '일재잔재'로 사라지고 대의원으로 명칭 변경이 되었나 봅니다.


2020년 3~4월 중 일제 강점기 행정지명에 대해 명칭 변경사업  [출처] ▣ 제2경춘국도 춘천 안 문제점 토론회 개최 요청, 친일청산 특위 집행부 활동 성과 보고 및 향후 방안


"동글이는 대의원 하고 싶어?"

"이제 4학년이 됐으니까 대의원 해야지."

"4학년이 되면 대의원을 해야 해?"

"그럼. 왜 엄마는 내가 대의원 하는 거 싫어?"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좀 기특해서...ㅋㅋㅋㅋ"

"월요일에 연설을 해야 해서 준비해 가야 돼."

"대의원 나가겠다고 했어?"

"응. 내가 손들었지."

"아~ 손들어서 후보 등록을 한 거야?"

"응."

"몇 명이나 나왔는데?"

"7명. 여자 4명, 남자 3명."

"7명이나 나왔어? 우와~ 너희만 친구들은 다들 적극적인 친구들인가 보다."

"아니야. 3학년 때는 15명이 나왔어. 11표를 받았었는데 한 표 모자라서 떨어졌었어."

"그렇구나. 그럼 올해는 연설을 잘해서 대의원이 되야겠네."

"응. 그런데 연설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연설문을 먼저 써야지."

"연설문은 어떻게 써?"

"안녕하세요. 저는 동글이입니다.라고 시작하면서 네가 대의원이 되면 어떻게 반을 이끌어갈지 적어봐."

"엄마가 도와줄 거야?"

"네가 다 쓰면 엄마가 조금 다듬어줄게. 그렇지만 엄마가 다 써주는 건 안돼."

"알았어."


노트를 펼치고 동글이가 생각을 거듭하며 적어 내려 간 연설문입니다.


동글이의 연설문
안녕하세요. 동글이입니다.
제가 대의원이 된다면,
첫째. 우리 반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당히 맞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둘째. 우리 반을 행복하고 열정적인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셋째. 언제나 열정적인 모습을 선보이겠습니다.
넷째. 친구가 다치거나 아플 때 보건실을 모를 때, 잘 알려주겠습니다.
저를 뽑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동글아, 그런데 보건실은 왜?"

"다치거나 아프면 혼자 가기 힘들잖아. 그러니까 도와줘야지."

"아... 그렇구나."


앵글이가 다가옵니다.


"뭐해?"

"응. 동글이가 대의원에 나간다고 연설문을 쓰고 있어."

"얘가?? 지가 하겠대?"

"응."

"벌써 그렇게 컸나?"

"뭐야... 애어른마냥..."

"아니, 나도 3학년 때부터 반장을 했었잖아. 그런데 동글이가 한다니까 왠지 되게 어색하네. 신기한데?"

"야... 누가 들으면 네 아들인 줄 알겠다...ㅎㅎㅎㅎㅎ"


앵글이가 연설문을 쓰고 있는 동글이를 어깨너머로 보더니,


"너 그거 써서 다 외워야 해. 안 떨고 씩씩하게 할 수 있어?"

"그럼, 누나는 날 뭐로 보고..."

"그냥 신기해서 그러지... 네가 이런 걸 쓰고 있으니까 신기하다 야... 그런데 너 인기는 있어?"

"나 인기 엄청 많아."

"그래? 몇 명이나 뽑아줄 것 같은데?"

"음... 아무리 못해도... 11명은 넘을걸? 작년에도 11명은 나 뽑았어."

"너네 반 몇 명인데?"

"25명."

"25명 중에 11명 넘게 널 찍어준단 말이야?"

"그럼. 어쩌면 더 많을걸?"

"오~ 이 자신감은 뭐죠?? 후보는 몇 명인데?"

"7명."

"7명이면... 전체 25명에 7명 후보 빠지면... 18명인데 그중 11표 이상 받는다는 거야?"

"그럼... 나 꼭 대의원 될 거야."

"그래... 열심히 해라... 동글!! 응원해~"


영혼 없는 누나의 응원입니다. 붙는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는 듯한 저 표정과 목소리는 뭘까요? 누나가 그러든 말든 신경 안 쓰는 동글이라 참 다행입니다. 생각해보면 동글이는 자기애가 큰  것도 같습니다. 가끔 학교에서 친구와 다툼이 생겼을 때, 당황하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선생님께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대체로 담임 선생님께서 잘 조율해주시지만 가끔은 동글이에게 억울한 판정이 내려져도 받아들이는 편입니다. 집에 와서 이러쿵저러쿵 상황 이야기를 합니다. 듣고난 후 '억울하지 않았어?'라고 물으면 '괜찮아. 어떻게 맨날 내편만 들어주시겠어.'라고 이야기하고 이내 잊어버립니다. 동글이의 이런 성품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앵글아, 동글이 연설문 쓴 것 조금 다듬어줄래?"

"내가?"

"동글이가 이미 다 썼어. 문맥이 어색한 부분만 다듬어주면 돼."

"그러지 뭐... 야~ 동글... 너 내일 꼭 붙어라~ ㅎㅎ"


안녕하세요. 동글이입니다.
제가 대의원이 된다면,
첫째. 우리 반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당히 맞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둘째. 우리 반을 행복하고 열정적인 반으로 만들겠습니다.
셋째. 언제나 성실한 모습으로 봉사하겠습니다.
넷째. 친구가 다치거나 아플 때 보건실을 모를 때, 함께 가 주겠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한 표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앵글이가 수정해 준 연설문으로 동글이는 일요일 저녁 소리 내어 연습을 했습니다. 곁에서 훈수를 두는 아빠는,


"동글아, 첫째! 하고 잠깐 쉬고, 둘째! 하고 잠깐 쉬면서 당당하게 말해봐."

"아빠~ 내가 알아서 할게."

"동글아, 너무 빠르잖아.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야지. 너 그리고 연설은 다 외워서 하는 거야."

"아빠~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


아빠와 아들의 실랑이가 이어지며 스무 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월요일 아침.
마치 대선 후보의 지지자들같이 동글이의 등굣길 배웅을 합니다.


"동글아~ 떨지 말고 잘해~"

"동글아~ 연설문은 잘 챙겼어?"


한 마디씩 거드는 엄마, 아빠를 뒤로 하고 동글이는 여유롭게 등교를 하였습니다.


오전 10:50

동글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 이 시간에 왜... 떨어진 거 아냐??' 주책없는 엄마입니다. 붙었다는 생각일랑은 전혀 하지 않은 채 '혹시 떨어져 실망해서 전화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찰나에 스쳐 지나갑니다.


"응~ 동글아~ 왜?"

"엄마, 나 대의원 됐어."


어머나 세상에... 동글이가 대의원에 붙었다는 소식을 이리 담담히 전해주다니요...


"정말? 진짜야??"

"그럼, 진짜지. 내가 뭐랬어. 붙는다고 했지?"

"잘했네. 축하해... 몇 표나 받았어?"

"15표."

"15표? 정말?? 그렇게 많이 받았어?"

"응. 이따 집에 가서 만나. 나 수업 시작될 것 같아서 끊을게."


동글이의 전화를 받고 고슴도치 엄마는 신이 났습니다. 앵글이는 3학년 때부터 매 해 반장을 했어도 이리 감동적이지는 않았는데 동글이가 대의원이 됐다는 소식에 플래카드라도 붙일듯한 이 기세는 뭘까요? 당장 남편에게 알려야겠습니다.


"여보~ 동글이가 대의원에 붙었어."

"진짜?"

"진짜야... 대단하지...ㅎㅎㅎ"

"그러게... 그 녀석... 친구들하고 잘 지내는 모양이야..."

"학급 인원이 25명인데 15표를 받았대. 대박이지?"

"오~~~ 과반수 이상 득표를 는데?"

"누가 들으면 대통령 당선된 줄 알겠어."

"동글이 좋아하는 것 좀 많이 사줘. ㅎㅎ"


전화를 끊고 동네 슈퍼앱을 열어 동글이가 좋아하는 한라봉, 딸기, 체리를 주문했습니다. 동글이가 하교하기 전 도착해야 할 텐데요...

 

동글이 하교 10분 전 도착한 과일들


하굣길 동글이에게 전화가 옵니다.


"엄마, 나 학교 끝났어."

"그래? 얼른 와~"

"엄마, 나 지금 기분이 엄청 좋아."

"좋겠네... 그래서 엄마가 동글이 좋아하는 체리랑 딸기랑 한라봉 사놨어. 얼른 와~"

"엄마, 그런데 나 오늘 좋은 날이니까 선물 줘."

"어떤 선물?"

"나, 엄마 핸드폰으로 카트라이더 1시간, 컴퓨터 게임 1시간 하게 해 줘."

"그래. 일단 집에 와."


동글이가 집에 돌아온다는 전화를 받고 한라봉 두 개를 까서 접시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현관에서 '쾅' 하고 신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엄마! 나 왔어."

"응. 손 씻고 과일 먹어."


실내화 주머니와 책가방을 내려놓고, 훌렁훌렁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져 놓더니 후다닥 욕실로 들어갑니다. 비누칠은 제대로 한 걸까요? 들어갔다 나오는 데까지 1분도 채 안 걸린 듯합니다. 약속대로 핸드폰을 건네주었습니다.


"동글아, 오늘 연설하는데 떨리지는 않았어?"

"엄청 떨렸지. 다리가 후달후달.. 내 다리가 없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목소리도 엄청 떨린 거 아니야?"

"그래서 연설문 써 간 거 보고 읽었어."

"큰 소리로 읽었어?"

"응."

"다른 친구들도 연설문 써 왔어?"

"아니. 나만 써왔어."

"그럼, 다른 친구들은 연설 어떻게 했어?"

"머릿속에 있는 거 그냥 말했겠지."

"다른 친구들도 연설 잘한 거 같아?"

"몰라."

게임 찬스를 즐기는 중인 동글이

게임기가 손에 들려있는데 대화에 집중이 될 리 가요... 엄마의 질문에 시선은 카트라이더에 둔 채 입만 건성건성 대답합니다. 그래도 신이 난 동글이는 오늘이 제일 행복한 날이라고 하네요. 동글이와의 일상은 오늘도 맑음입니다.


첫째를 키울 때는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선 두려움과 당연함이 있었습니다. 첫째의 나이가 제 육아 나이와 같으니까요. 아마도 첫째가 30, 40, 50살이 되어도 30살도, 40살도, 50살도 처음 키워보니 계속해서 낯선 경험이 이어지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첫째에게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오롯이 그 감정 그대로 느끼고 맞장구를 쳐 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늦둥이 동글이와 굳이 비교하자면 앵글이가 모든 면에서 월등했습니다. 두 돌이 지나며 한글을 떼어서 유아기에도 동화책을 되려 앵글이가 제게 읽어줄 정도였으니까요. 학교 수업도 사교육 없이 혼자 알아서 척척 해 내어 모든 아이들이 다 앵글이 같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앵글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매 해 반장을 해왔지만 (당연히 하는 줄 알았는지) 동글이게서 느끼는 이 신기함과 놀라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앵글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쑤~욱 올라오네요. 오늘은 앵글이의 하교를 도와주러 배웅을 가야겠습니다. 하교 후 대중교통으로도 잘 오겠지만, 하루 종일 급식도 먹지 못하고 지친 아이를 배웅하면 좀 더 일찍 집에 와 쉴 수 있을 테니까요. 깜짝 선물처럼 방문 한 엄마의 배웅이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덩달아 신이 난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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