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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Apr 12. 2022

남편과 둘이 먹는 밥은 산해진미도 맛이 없다.

한바탕 코로나가 온 집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이들은 젊어 그런지 후유증 없이 회복되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남편과 나는 잔기침과 피로감으로 고전 중이다. 역시 세월에는 장사 없다.


"여보?"

"응?"

"코로나로 지친 몸을 빨리 회복하려면 소고기가 좋대."

"그래?"

"응."

"그럼 먹어야지..."

"주말에 애들 데리고 소고기 먹으러 갈까?"

"뭘 주말까지 기다려... 나랑 지금 소고기 먹으러 가자!"

"정말? 출근 안 해?"

"해야지... 마침 적성 현장 돌아봐야 하는데 거기 엄청 맛있는 소고기집 있어. 바람도 쒤 겸 거기 가자."


가끔 남편은 나를 이끌고 현장을 찾는다. 장소가 멀면 멀어서 오가는 길 심심하니까 같이 가고, 까다로운 건축주 미팅이 있을 때는 비서를 겸해 동반하기도 한다. 오늘은 초등학교 퇴직 후 뜻이 같은 여러 선생님들의 꿈을 담은 전원마을이 세워질 현장 답사를 함께 갔다.


적성 현장으로 가는 길


겨울 옷을 벗어던진 푸른 하늘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내밀고, 봄내음을 양껏 머금은 살랑살랑 바람결은 볼을 간질였다. 보름이 넘도록 코로나로 갇혀 있던 답답함을 던져내기에 벅차도록 포근한 봄볕이다.


남편과 함께 현장 돌아보기는 연애할 때부터 자주 했던 일이다. 나는 핑계 김에 드라이브를 해서 좋고, 남편은 오가는 길 심심하지 않아 좋으니 일석이조다. 곁다리로 따라붙으면 맛난 밥도 나오고, 때로는 용돈도 따라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 좋은 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는 거다. 그러고 보면 못 말리는 팔불출 아내가 맞다.


남편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는 일은 까다롭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장 감리 차 방문하는 것이어서 남편이 방문할 때는 주로 인부들이 없는 시간이거나, 현장이 아직 꾸려지기 전 일 경우가 많다. 가끔 낮에 남편과 함께 현장을 찾으면 현장 소장부터 각 분야 주임들이 줄줄이 남편을 따라다니며 메모하고 지시를 받는다. 아내 입장에서 남편이 일하는 모습은 멋져 보이지만 남편은 일손이 바쁜 현장에서 불필요한 시찰을 하고 싶지 않아 한다. 이미 건축이 진행된 현장을 방문할 때는 주로 암행을 간다. 건축 현장은 고된 작업이 대부분이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분들에게 궂은소리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새벽에 조용히 현장을 찾아 잘못된 부분을 사진 또는 영상으로 담아 현장 소장에게 수정 사항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감리를 본다. 건축사로 20년 넘게 계속되는 남편의 새벽 암행은 현장에 대한 배려였다. 이러한 남편의 마음씀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아침도 거른 채 현장을 돌아본 후 적성 한우 마을까지 가는 동안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은 듯 허기가 밀려왔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식당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한 번에 먹는 양은 많지 않지만, 배고픔을 느끼는 순간부터 '배고파'를 연발하며 남편의 운전대에 '빨리빨리' 시동을 걸었다.


"아이고... 우리 로운이 앵글이 되기 전에 얼른 가야겠네."


눈썹이 유독 짙고 숱이 많은 편이라 어릴 때 별명이 순악질 여사, 앵글이 버드, 짱구... 였다. 타고나길 짙게 타고났는데 유전인자가 센지 앵글이, 동글이도 눈썹이 짙다. 우리 네 식구 중 눈썹숱이 가장 적은 남편은 늘 우리의 짙은 눈썹을 부러워한다. 관상학 적으로 짙은 눈썹이 지붕 역할을 하여 재물이 세어나가는 것을 막아준다고도 하니 짙은 눈썹을 갖고 태어난 건 좋은 일이다.



겉모습만 보아도 맛집 같아 보이는 적성의 정육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부위는 안심이다. 1++ 소고기의 곱디 고운 마블링을 보며 우리는 욕심껏 두 판을 구매했다. 주인장이 육사시미 두 접시를 서비스로 주셨다. 사이좋게 하나씩 먹으라고 두 개를 주셨나 보다. 센스 만점 사장님이시다.



소고기는 육즙이 가득했고, 특유의 풍미가 있었다. 일산에서 자주 가던 단골집과 비교했을 때 이곳 소고기는 상당히 부드럽고 맛이 좋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자주 먹던 소고기에 비해 월등히 맛있었다. 그런데 한 팩을 구워 반도 채 먹지 못했는데 목에 걸린 듯 맛이 없어졌다. 한 입 가득 고기를 넣었을 때 사르르 녹던 그 감동이 네댓 점도 채 먹지 않았는데 헛배를 불러왔다.


"여보... 이상해."

"왜?"

"맛이 없어."

"나도."

"왜 그렇지?"

"그러게... 한 팩은 싸가야겠지?"

"애들이 없어서 그런가 봐."

"그렇지? 나도 그 생각했어."

"애들이 옆에 있었으면 굽기가 무섭게 가져가서 게눈 감추듯 사라졌을 텐데 둘이 먹으니까 고기가 자꾸 말라."

"주말에 애들 데리고 다시 와야겠다. 그렇지?"

"고기는 애들이랑 와서 먹어야 맛있나 봐."


부모 마음이 그렇다. 한참 먹성이 좋아진 동글이는 한 자리에서 소고기 500g은 너끈히 먹는다. 소고기에 물냉면에 된장찌개를 얹은 공깃밥 반 공기까지 어떻게 저 작은 체구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나 싶도록 눈 깜짝할 새 먹어 치우는 동글이가 없으니 몇 점 먹지도 않았는데 헛배가 부르고 맛이 없어졌다. 고3이라 한참 공부하느라 기력이 떨어졌을 앵글이도 눈에 밟혀 우리 부부는 구워둔 고기로 적당히 배를 채우고 아이들 먹일 고기를 추가로 더 구매해서 식당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소고기를 구워 저녁상을 차려주었다. 역시 잘 먹는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가족은 함께 해야 행복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아이들 먹는 모습을 보며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적성으로 달렸다. 월요일에는 몽우리만 있던 나무들에 아름다운 꽃눈이 팡팡 터졌다. 너무나 아름답다.



같은 장소, 같은 음식인데 넷이 합체를 하니 행복감이 달랐다. 아이들은 역시 잘 먹어주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거반 20만 원의 소고기값이 지불되었다. 그런데도 흐뭇했다. 잘 먹어주니 고맙고, 맛있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한 잠시 잠깐의 나들이도 좋았고, 그 길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반겨주어 더 좋았다.


이상하다. 남편과 단 둘일 때는 그 사람 먹는 것만 봐도 좋았고, 둘이 함께라면 돌멩이도 맛있게 느껴졌다. 안 먹어도 배불렀고, 길거리 포장마차의 떡볶이만 먹어도 행복했다. 둘이 넷이 되니 둘만 먹을 때는 맛이 없다. 넷이 되고 나니 둘은 바라만 보고 둘만 먹어도 꿀맛이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우스갯소리로 남편은,


"다시 태어나면 난, 동글이로 태어날 거야."

"왜?"

"울 엄마는 당신처럼 날 챙겨주진 않으셨거든. 동글아~ 넌 로운이가 네 엄마라서 참 좋겠다."

"그럼, 동글이로 태어났는데 엄마는 여전히 어머님이면 어떡해?"

"야~~~ 그건 아니지... 로운이를 엄마로 해서 동글이로 태어날 거야. 반드시!!"

"난 그 탄생 반댈세...ㅋㅋㅋㅋㅋ"


늦둥이 동글이가 태어난 후 조용한 우리 집은 늘 북적인다. 말 수 없는 앵글이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서 셋이 있어도 사람 소리가 별로 나지 않았다. 방방 뛰며 집안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데는 동글이가 단연코 일등공신이다. 덕분에 밥상머리에서도 동글이가 있어야 맛이 배가 된다.


"예전에는 나만 있으면 된다더니... 로운이가 변했어. 이제는 동글이만 챙기고 나는 찬밥이야. 동글이가 편식을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동글아~ 아빠를 위해서 엄마한테 이것저것 많이 해달라고 해. 덕분에 아빠도 좀 얻어먹자!"


아침마다 메뉴를 정해주는 동글이 덕분에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동글이 위주로 차려진다. 다행인 것은 동글이는 밥돌이다. 덕분에 남편도 동글이가 정해준 메뉴에 불만이 없다. 빵돌이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싶단다. 음식도, 생활도 넷이 모두 함께일 때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여전히 행복하다.


가족이 있어 참 좋은 로운입니다.




덧.

글을 쓰고 있는데 남편이 등 너머에서 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뭐 써?"

"응~ 우리 둘이 소고기 먹은 거...  둘이 먹다 애들 데리고 다시 갔잖아."

"난 또... 제목만 보고 깜짝 놀랐잖아. 나랑 밥 먹기 싫다는 줄..."

"아코...  그랬어요? 아구구... 울 남편 삐질 뻔..."


글쓰기 커닝하는 남편과 동글이... 제목만 보고 상처받을 뻔했다는 후문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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