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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May 03. 2022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죠~"

아이들은 가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


7세 반 교사를 맡고 있을 때 반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니?"

"네~"

"알아요~"

"그래? 그럼 가난이 뭘까?"

"가난하면 장난감을 살 수 없어요."

"가난은 돈이 없는 거예요."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사는 거예요."

"엄마가 가난하면 유치원도 못 간다고 했어요."

"그럼, 가난해서 쌀을 못 사면 밥을 못 먹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쌀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죠~"


아이들에게 가난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 현실이다. 단지, 장난감을 못 사고,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 없고, 재미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이 가난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어릴 때의 가난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반지하 방에서 나는 꿈꿈한 곰팡이 냄새 때문에 기침을 달고 살았고, 여름이면 털이 숭숭 달린 송충이가 벌어진 새시 틈을 타고 천정을 까맣게 채웠다. 자고 있으면 볼 위로 툭툭 떨어지는 송충이 때문에 잠들기가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6개월 이상 같은 집에서 살았던 기억도 거의 없다. 이사가 잦아지니 10살의 나도, 14살의 오빠도, 부모님도 제 짐 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쉬웠다. 번듯한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도 아니었다. 월세를 내는 것도 부담이라 최대한 보증금이 작은 집을 알아보다 보니 방한칸 전세를 전전하며 더부살이를 했다. 서럽고 서러운 유년기였다.


국민학교 4학년 3월,

심한 감기로 일주일을 등교하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 매일 매시간 보는 쪽지시험도 싫었고, 등교하자마자 어제 본 쪽지시험에서 틀린 개수만큼 손바닥을 맞는 것도 무서웠다.


처음에는 꾀병으로 시작되었다. 아랫목에 이불을 둘러쓰고 이마를 뜨끈하게 데운 후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린 채 엄마에게 냅다 뛰어갔다. "엄마, 열이 많이 나요." 이마를 짚어보시던 엄마는 깜짝 놀라 등교하지 말고 병원부터 가라고 하셨다.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시고 혼자 집에 있었다. 처음에는 꾀병이었는데 긴장이 풀려서일까? 정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 홀로 집을 지키던 나는 고열로 하루를 꼬박 보냈고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에게 병원을 다녀오지 않아 더 심해진 거라며 싫은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일주일 동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꾀병이 낳은 호된 대가였다.


학교에 가니 CA활동 교과 분장을 마친 상태였다. 남는 자리는 [무용반] 뿐이었다. 합창반에 들어가고 싶어 내내 기다렸는데 결석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부지리로 무용반에 배정되었다. 1년 동안 "덩더꿍 체조"만 배웠다. 동작이 잘 나오지 않으면 무용선생님께서 장구채로 훈육을 하셨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선생님이 무서워 무용반 수업이 있던 금요일에는 결석도 할 수 없었다.


5학년이 되었다. 무용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합창반을 신청하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CA 첫 시간! 콧노래를 흥얼대며 음악실로 갔다. 잠시 후 음악실 앞문이 열리며,


"로운~ 로운 어디 있어?"


무용선생님이시다. '어떻게 된 거지?' 놀란 토끼마냥 눈이 동그래진 내게 다가와 선생님께서는 장구채로 정수리를 '탁!' 내려치시며,


"너! 누가 합창반으로 옮기래!! 1년 내내 가르쳐놨더니 물어도 안 보고 니 맘대로 합창반으로 와? 따라 나왓!"


선생님께 이끌려 무용반으로 갔다. 나 말고도 몇몇 아이들이 다른 부서로 옮겼다가 선생님께 혼쭐이 났다. 이후 6학년까지 3년 동안 무용반 수업을 받았다. 3년 동안 우리는 "덩더꿍 체조"만 배웠다. 선생님께서 왜 그리 "덩더꿍 체조"에 진심이신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선생님께서 이끄는 대로,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그냥 따를 수밖에 없던 우리는 기계적으로 동작을 익혔다.


6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10월에 전국 덩더꿍체조 대회에 참가하게 될 거야. 3년 동안 연습했던 그대로 하면 우승은 우리 학교가 될 거다. 모두 자신 있지?"


어리둥절한 건 나뿐이었을까? 우렁차게 '네!'하고 외치는 아이들의 표정은 들떠 보였다. 알고 보니 우리 학교는 "덩더꿍 체조" 시범학교였다.


"단복을 맞춰야 하니 부모님께 안내문 보여드리고 다음 주까지 신청해. 한복이라 치수도 재야 하고 단복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날짜를 지키도록 해!"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안내문에는 단복 비용이 57,00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우리 집 형편에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아버지는 대학원을 다니며 일을 하셨고,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다. 방한칸 전세 살던 우리 집 살림살이를 고작 13살 아이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려운 형편이 나를 조숙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한 달 내내 종이 쪼가리를 이고 지고 다녔다. 매주 무용시간마다 선생님께 궂은소리를 들었다. 장구채로 맞으며 험한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내내 수업에 참여 못하고 복도에 서 있었지만, 끝내 부모님께 안내문은 보여주지는 못했다.


드디어 대회날, 우리는 잠실 학생체육관으로 향했다. 단복이 없던 나도 함께 갔다.


"너! 단복을 끝내 안 맞췄다 이거지? 너 때문에 대열이 다 흐트러진 건 아니? 없이 사는 것도 민폐야. 그걸 알아야지. 넌, 선수 대기실에서 친구들 하는 거 똑바로 보고 있어!"


우리 학교는 전국 1등을 거머쥐었다. 우리 학교가 "덩더꿍 체조"를 하는 장면과 시상식 모습이 그날 9시 뉴스에 나왔다. 3년 내내 연습했던 그 체조는 무용반 전체에서 내가 제일 잘했었다. 내 자리는 정 가운데, 제일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나는 대기석에서 친구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비난받고, 천대받고, 업수이여김을 받아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그것이 내가 경험한 가난이다. 4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57,000원! 그 시절 아버지의 월급은 30만 원이었다. 철이 좀 늦게 들었다면 떼를 써서라도 받아냈을지 모른다. 조르고 사정했으면 빚을 내서라도 맞춰주셨겠지만, 대회날 하루 입기 위해 그 큰돈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나에게 가난은 그런 거였다. 돈이 없으면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총을 견디고, 부끄러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 그리고 잘못한 것이 없어도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몇 해 전, 엄마와 함께 찜질방에 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시절 무용복 이야기를 했다. 4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를 건네니,


"그 얘길 왜 이제사 하니? 그때 이야기했으면 사줬을 텐데..."

"그때는 그 돈이 너무 큰돈이라 안내문을 보여줄 수가 없었지."

"그걸 왜 네가 판단해. 그런 건 어른들이 생각하는 거지."

"보여드렸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사주셨을 테니까..."


눈물이 났다. 그 시절에는 네 식구 모두가 가난했다. 감히 말도 못 꺼낼 만큼 매일이 생생한 가난 이라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말하지 못했을 것 같다.


10살 나의 꿈은,

여름에는 비가 안 새고, 겨울에는 보일러가 안 터지는 집에 사는 것이었다.


밖에서 가랑비가 내리면 우리 집 천정에서는 굵은 소나기가 내렸고, 주방과 마당 하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서 방안 가득 홍수가 났다. 새벽에 비가 내리면 등짝이 물에 젖어 흥건해질 때쯤 잠에서 깨어 온 식구가 장판을 걷어내고 쓰레받기로 물을 냈다. 겨울마다 보일러가 꽁꽁 얼어 터졌고, 날이 풀리기까지 수리가 되지 않아 겹겹이 이불을 덮어도 추위를 감추지 못했다.


돈이 없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자랑할 일도 아니다. 힘들었고, 부끄러웠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살림살이가 나아졌음에도 몸에 밴 절약은 습관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부자로 살아 보지 못해서, 누려보지 못해서 주머니에 돈이 있어도 '꼭 필요한가?'를 늘 생각한다. 돈은, 써 본 사람이 누리고 쓰며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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