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노트북을 샀다. 업무용이었다. 미팅이 있는 날 외에는 가방 속에 처박힌 노트북이 탐이 났다. 야금야금 노트북을 꺼내어 내 것처럼 사용하다 이제는 식탁 한구석 떡허니 차지하고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내 것이 되었다.
"노트북, 그거 내 건데..."
"미팅 있을 때만 썼잖아. 내가 안 쓰면 가방 속에 있었을껄 뭐... 미팅 있는 날은 내가 빌려줄게."
"내 건데 왜 네가 빌려줘. 내가 빌려주는 거지."
"매일 쓰는 사람이 주인이지."
당당했다. 모름지기 모든 물건은 절실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냐는 나만 유리한 이론을 펼치며 노트북을 빼앗았다. 그 후 일 년여 시간 동안 노트북은 나와 동고동락 중이다.
미팅이 있다며 남편이 노트북을 챙겨 출근을 했다. 종일 뭘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어지러웠다. 청소도 하고, 주말 동안 쌓인 빨래를 했다. 괜스레 침대 시트를 갈고,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에 건조를 하다 보니 세탁기가 네 번이나 돌아갔다. 쥔장의 변덕으로 애먼 세탁기와 건조기만 고생했다.
집에 컴퓨터는 많다. 동글이꺼 하나, 남편 꺼 하나, 앵글이 노트북 하나. 내 노트북이 없다고 해서 글을 못쓴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못쓰겠다. 남편 컴퓨터를 열었다. 쓸데없이 은행업무만 잔뜩 보았다. 브런치를 열었다. 댓글도 답글도 못쓰겠다. 키보드 자판이 노트북의 자판보다 높고 타닥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내 손에 익숙한 마우스가 아니어서 클릭할 때마다 사나운 소리를 낸다. 이 또한 거슬렸다. '에잇!' 짜증스레 컴퓨터를 꺼버렸다. 그리고 노트북을 기다렸다. 남편은 밤 10시가 돼서야 들어왔다. '칫!' 맥이 빠졌다. 오늘은 휴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게 익숙한 화면, 자판, 마우스, 노트북 거치대, 안정된 식탁 모퉁이의 내 자리가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글 쓸 준비 완료다. 물론 핑계다. 하지만 내게는 절실하다.
나에게 노트북은 그냥 노트북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가득 담긴 노트북은 '나'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글을 쓰기 위해 모아둔 자료들, 관심사, 일, 가족, 그리고 기록이 담겨있다. 노트북이 사라지고 난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그저 노트북 하나일 뿐인데 말이다.
아침을 깨우는 브런치 알림이 울리고, 혜남세아 작가의 글을 부르는 글을 쓰고 싶다 를 읽었다. 작가의 글에서 등장하는 글벗, 마음을 움직이는 글, 위로와 동력이 되는 댓글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문득 '나의 노트북'이 떠올랐다. 수많은 글과 글벗이 되어준 작가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나의 노트북'은 오랜 친구처럼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내가 만든 폴더에 차곡차곡 쟁여진 기록들은 민낯의 나이고, 소중한 기록이다. 그 속에 담긴 폴더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소중함을 되새겨 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귀한 것, 사소한 것 같지만 소통과 추억이 담긴 것, 이것이 나의 노트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집 나갔다 돌아온 노트북과 해후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