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간병하기 시작한 건 11살부터였다. 80년대 초중반 신촌 세브란스는 연일 계속되는 최루탄 가스로 몸살을 앓았었다. 엄마가 입원해 있던 병동은 낡고 노후해서 창문을 아무리 꽁꽁 닫아놔도 최루탄 가스로 뒤덮였고, 보호자들은 얼음팩을 나르느라 맵고 따가운 최루탄 가스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얼음팩을 얼굴에 대고 있으면 그나마 조금 나았으나 그조차도 할 수 없는 신생아실에서 들려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애처로운 절규처럼 들렸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그 후에도 엄마는 자주 아팠고, 나는 병원에서 등하교하는 일이 잦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3 때도 영동세브란스에서 학교를 오가며 엄마의 병실을 지켰었다.
엄마를 괴롭게 했던 허리디스크는 수술대에 세 번이나 오르게 했지만 여전히 통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릎도 5년 전 왼쪽에 이어 지난 7월, 오른쪽까지 수술대에 오르게 했다. X레이를 찍으면 엄마의 몸 곳곳에 쇳덩이가 보인다. 점점 인조인간이 되어간다며 웃음 섞인 농담을 나누지만 엄마의 몸에 인공관절이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수없이 병원을 오갔어도 괜찮았다. 수술하면 좋아지는 질병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폐암' 소식은 듣고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CT 사진 속에 보이는 덩어리는 그저 종기 같은 것이려니 믿고 싶었다. 병 때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나빠질 수 있으니 마음 단속을 잘하자고 두려울 엄마의 마음을 다독여드렸다.
"엄마, 우리 수술받기 전까지 맛집 투어 해 볼까?"
"좋지."
엄마의 재활을 위해 매일 통원치료를 받았다. 도수, 운동, 물리치료를 마치면 일산, 운정의 맛집으로 몸보신 투어를 했다. 몸에 좋다는 건 뭐든 먹고 말 것이라는 듯 맛집을 찾았다. 무릎 수술로 축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만 엄마와 둘의 사치스러운 점심은 꽤 근사했다.
'암'을 이길 수 있는, 엄마가 힘낼 수 있는 이유를 찾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좀 무리가 되더라도 한국에 와줘. 엄마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오빠였으면 좋겠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고 선물처럼 나타나라고 했다. 입이 근질근질한 오빠는 엄마와 통화할 때마다 '어머니, 제가 갈까요?' 하며 떠보기를 계속했고, 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엄마는 '뭣하러 와? 네가 와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라며 거절하기를 반복했다. '눈치코치 없는 오빠 같으니라고...'
입원 전 날, 짐 꾸리기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엄마를 모시고 엄마 집으로 갔다. 해가지면 운전을 잘하지 않는 딸에게 엄마는 해지기 전에 어서 집에 가라고 재촉하셨다.
"아니야. 내가 가면 엄마 혼자 있잖아. 아버지 오실 때까지 같이 있어줄게."
내심 좋아하시는 엄마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빠에게서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1시간 10분 후 도착 예정이라고 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아들을 보고 놀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엄마가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구경하는 맛이 있을 듯한 기대감도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티빙으로 엄마와 함께 [임영웅 콘서트 IM HERO]를 시청했다.그때! '띠리링' 엄마의 핸드폰에 문자메시지가 떴다.
"이 시간에 아들이 왜 돈을 쓰지?"
'헉' 오빠가 카드를 긁었나 보다. 하와이 시간으로 새벽 1시, 돈을 쓸 시간이 아니라서 엄마가 한 마디 건네셨다. 엄마가 문자를 들여다볼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오빠의 신용카드 내역보다 임영웅 힘이 더 셌다. 함께 콘서트를 보다 엄마가 일어나 거실을 서성이며 걷기 연습을 시작했다. 잠시 뒤 도어록 소리가 들려오고 엄마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신이야? 일찍 왔네? 어? 저건 우리 아들 얼굴인데? 어? 어? 진짜 아들이야?"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다. 엄마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오열했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오빠는 허허 웃었다.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나도 눈물이 찔끔 났다.
"너 웬일이야? 내가 오지 말랬잖아.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나를 보며) 어쩐지 저 가시내가가라고 해도 안 가고 있더라. 하루 종일시치미 뚝 떼고 말을 안 하더니..."
"엄마 힘내라고 내가 오라고 했어.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오빠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엄마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아들 데려다 놨으니까 힘내라고..."
"고맙다... 막상 보니 좋구나... 좋아..."
마음이 약해져 헛것이 보이는 줄 알았다며, 순간 '암'이 무섭긴 한가보다 생각했었다는 엄마는 아들에게
"널 보기만 해도 안심이 되고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를 위해 한 달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선물박스가 열렸고, 기대 이상의 기쁨을 드릴 수 있었다. 그거면 족하다.
피할 수 없는 그날이 찾아왔다. 입원부터 아들과 함께였으면 좋겠지만 코로나 검사 음성 문자를 받아야 병원 출입이 가능하기에 내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신촌 세브란스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별 일 아닐 거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라고 다독이며 안심시켜드렸다. 그리고 기도했다.
입원을 하고, 수술 전 검사를 위해 영상 촬영실로 향했다. 암이 중한병이긴 한 모양이다. 수술 전 2주 동안 엄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9개 과를 돌았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병실을 배정받자마자 또 검사 시작이다.
하루 2시간 이상 걷기 운동을 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수술 전 검사를 마친 후 병원 로비를 걸으며 운동을 했다. 곳곳에 쉼터가 있어서 외출은 못해도 환기는 되었다.
"엄마, 사진 찍어줄게."
"뭔 사진... 이런 꼴로??"
"이것도 다 기념이지..."
'여기 서 봐, 저기 서 봐.' 하며 꽤 여러 장 찍었지만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웃고는 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니 표정이 찌그러져있어서 안 이쁘네..."
"엄마 불안해?"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무섭고 불안하네..."
"엄마, 자고 일어나면 병실일 거야. 아무 일 없이 수술 잘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새벽 4시 30분부터 혈압과 열체크를 시작했다. 수액을 달기 전 엄마 양치를 돕고 가글을 했다. 대학병원 수술은 연장자 우선이다. 나이 많은 순, 신생아, 그리고 일반인으로 수술시간을 배정받는다. 엄마는 첫 시간으로 배정되었다.
"환자분, 수술방으로 이동하실게요..."
수술 침대가 병실로 들어오니 엄마의 눈망울이 커지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좀 전까지 씩씩하던 엄마는 온데간데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 겁에 질린 엄마만 덩그러니 서 있다.
"엄마, 괜찮아. 내가 기도하며 기다릴게. 엄마도 힘내!"
"환자 분만 가실게요. 감염위험 때문에 보호자분은 수술장으로 가실 수 없습니다."
엄마를 뒤따라 수술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까지만 함께 갔다. 내 손을 꼭 잡은 엄마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로운아,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엄마, 나도 사랑해. 수술 잘 될 거야. 엄마 힘내~"
그렇게 엄마는 수술방으로 갔다. 엄마가 내려가고 난 뒤 눈에 들어온 빈 침대, 엄마의 슬리퍼가 너무도 서글펐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에도 여전히 해가 뜨고 진다. 매일 푸른 아침이 나를 맞이하고, 붉은 석양이 내게 인사를 건넨다. 수술을 마친 엄마가 통증과 씨름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제 할 일을 해낸다. 나도 역시 그렇다.
보글보글 9월 3주 "엄마"
1년 중 가장 달이 밝은 보름,
우리 집 창 밖에도 커다란 달이 떠올랐어요.
대학병원은 급한 불만 끄면 바로 퇴원을 시킵니다. 4박 5일 동안 입원, 수술, 퇴원 절차가 모두 마쳐지죠. 엄마는 집 근처 암 전문 요양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엄마가 멀리 계신 것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합니다. 매일 들여다볼 수 있으니 좋고, 몸의 거리가 가까우니 안심이 됩니다. 수술한 지 3일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은 많이 힘드시지만 매일 조금씩 나아지겠죠. 건강할 때 건강에 관심을 갖고 나를 더 사랑해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의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프고 무섭고 견뎌야 하는 과정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엄마가 아픈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함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