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Oct 20. 2022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열아홉 앵글이는 진로를 고민하며 공부를 선택했다. 이유는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라고 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자나 깨나 그림 생각에 들뜬 적이 없고,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지만 밥을 안 먹어도 피아노만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든 적도 없고,

운동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종목만 좋아하니 입시 체육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예체능은 적성이 아니며 천부적인 재능 또한 없는 것 같단다.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그렇게 선택한 일반고 진학을 두고도 한참을 고민했었다. 중학교 내신으로는 특목고 진학이 가능했기에 담임선생님께서는 특목고 진학을 권유하셨지만,


"국제고나 외고는 문과 진학에 유리한데 나는 이과를 선택할 거라서 그쪽은 아닌 것 같고, 자사고나 자공고에 가면 천재들에게 밀려서 자존감이 낮아질 것 같아. 그냥 일반고에 가는 게 좋겠어."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는 게 낫겠다는 앵글이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게 선택한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였지만 막상 일반고에 진학하고 보니 역시 어느 학교를 가든 천재는 있다.


"앵글아, 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꼭 대학 진학 때문인 것은 아니야. 공부만 하려면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 더 빠르겠지. 고등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봐. 딱 그때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려보렴."


앵글이는 1, 2차 면접을 거쳐 학생회 위원이 되었고, 학급 임원에 선출되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자발적 참여를 하지 않았던 앵글이라 이러한 변화는 참 반가운 일이었다. 학급과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모난 돌 같던 앵글이의 성격이 조금씩 둥글게 다듬어졌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마음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갔다.


학교의 각종 교내 대회를 자발적으로 신청해서 참여했고, 다수 성과를 면서 앵글이는 서서히 고등학교에 적응해갔다. 1, 2학년 생기부를 성실하게 채워나갔고, 이변이 없는 한 수시로 안전하게 대학 진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무렵 앵글이가 진로변경을 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수시 지원을 포기했다.


올 한 해 풀어낸 문제집

아이의 결정에 고민 없이 OK를 외칠 엄마는 드물다. 함께 고민하기를 일주일, 다시 생각해보길 일주일, 결정 후 갈등하는 아이를 위로하길 일주일, 앞으로의 험난한 길을 응원하길 일주일, 그렇게 한 달을 지낸 후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은 앵글이는 홀로 공부를 잘 해내고 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다지고 다지는 연습만 남았다. 결과물이 '대학 합격'에만 있다면 아직 앵글이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미지수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꿋꿋이 자기 길을 걷고 있는 그 과정에 결과를 둔다면 이미 합격이다.


엄마도 열아홉의 딸은 처음 키워봐서 미숙하다. 그렇게 함께 성장하며 19년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 중심에 늘 '아이의 선택'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어른이 곁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 해 내야 할 사람은 '아이'이기 때문에 어떠한 선택을 하든 아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이는 앵글이가 야무지고 단단해서 잘 해내는 것이지 아이가 무르고 결단력이 부족했으면 엄마도 함께 종종 댔을 거라 말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이가 무르다면 단단해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걷고 싶다.


앵글이도 나도 2022년 11월 17일을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치른 입시보다 앵글이가 치러낼 입시가 더 혹독하게 느껴진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있지만 모의고사를 치를 때마다 긴장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린다. 10월 모의고사를 치른 후 아무렇지 않은 앵글이와 달리 나는 몸살이 흠씬 났다. 대신 몸살을 앓는 엄마를 보며 '엄마, 나를 너무 사랑하는 거 아냐?'라며 놀려대는 앵글이와 한바탕 웃었다. 마치 입덧하는 아내 곁에 더 심한 입덧을 하는 남편 같다.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 때 제가 더 죽겠다고 앓아눕는 남편을 보며 섭섭하고 얄밉던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하면 앵글이 마음이 나보다 낫다.  


앵글이는 나에게 교과서가 되어주었다.

사교육 없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사고를 굳건히 해 주었고,

아이 스스로 결정하는 진로에 엄마는 묵묵히 응원만 해 주어도 된다는 믿음을 주었다.


열아홉에 '대학 입학'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스물이 있으니까 말이다. 고3에서 대 1로 바로 옮겨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지지만 1~2년 늦춰져도 괜찮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필요에 의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도 괜찮다. 대학을 진학하는 이유가 간판이 필요해서이거나, 주변의 시선과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점수에 맞춰 적당히 선택한 대학에 진학해서 배움과 상관없는 진로로 취업을 하는 것보다는 3~6년 투자한 시간을 충분히 녹여낼 수 있도록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옳다.


아직은 모든 것에 미숙한 아이와 함께 의논하고 토론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렵지만 본인이 걸어야 할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고 책임지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12년 학령기의 종착점이 가까워오고 있다. 많은 엄마들이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다고 하는데 나는 매일이 기다려진다. 큰 아이의 스무 살은 나의 육아 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