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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Oct 17. 2022

수능 31일 전. 고3 딸아이의 스트레스 해소법

보글보글 "한때"

지난 수요일 10월 모의고사를 마치고 목요일부터 3학년 2학기 마지막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습니다. 3학년 들어서며 내신 포기 선언을 한 딸아이는 시험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수능 공부를 하고, 시험지에는 한 줄 세우기를 하고 돌아옵니다. 지난 9월 친구들이 모두 수시 지원을 할 때 한 곳도 원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뚝심으로 수시 원서를 한 곳도 내지 않은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아이의 다소 무모한 도전을 묵묵히 응원해주는 중입니다.


아이에게는 내게 없는 결단력이 있습니다. 다시 30년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신 한 번호로 줄 세우기 및 수시 원서 포기하기 등과 같은 도전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겁니다. '불안'이 올라오기 때문이죠.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참 다릅니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아이는 참 열심히 삽니다. 내가 살아 낸 열아홉보다 훨씬 더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 아이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해. 수시 지원을 하고 나니 합격한 것 같나 봐."

"그 틈을 파고들어 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학교에 있는 8시간 동안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집에 와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거야."


해이해진 고3 교실에서 묵묵히 자습을 하는 몇 안 되는 길을 선택한 아이는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일 5시, 하굣길 아이를 데리러 학교 앞으로 갑니다. 제 몸무게만큼 되는 가방을 끌어안고 가로등 기둥에 기대어 영혼 없는 눈빛을 한 아이가 저 멀리 보입니다. 그래도 마중 온 엄마의 차를 보면 화색이 돕니다.


"어휴... 오늘 정말 힘들었어. 머리가 지끈지끈해. 그런데 엄마, 오늘 저녁은 뭐야?"


영락없는 열아홉 고등학생입니다. 아이가 진로와 사투를 벌이는 시간 동안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중하는 것과 아이의 먹거리를 준비해주는 것뿐이지만 아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엄마가 해 줄 건 없지.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뭘..."



아기 때부터 종이퍼즐을 좋아하는 앵글이입니다. 뽀로로 퍼즐을 시작으로 지금은 천 피스 이상의 퍼즐 맞추기를 무한 반복합니다. 꼼짝 않고 하루 종일 망부석이 된 듯 앉아 퍼즐을 맞추고 있는 고3 딸아이입니다. 종류에 따라 7~8시간쯤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다 맞추고 나면 인증샷 하나를 남기고 과감히 허물어냅니다. 하루 정도는 두고 봐도 좋을 듯 하지만 완성 후 허무는 맛이 있는 모양입니다.


D-day 34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께 통증에서 벗어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유화 그리기 몇 개를 선물했습니다. 단골 사장님께서 하나 더 선물해 주신 그림을 들고 들어온 날,


"어? 이거 내가 해도 돼?"


수능이 40일도 채 남지 않았지만 틈 나는 대로 책상에 다가와 색칠 삼매경에 빠져드는 앵글이입니다.


"엄마, 이게 한 번 잡으면 놓지를 못하겠네. 할 것 다 해 놓고 자기 전에만 건드려야겠어."


밤 10시가 넘은 시간 딱 두 시간만 하다 자겠노라며 색칠을 시작합니다.


"앵글아, 오늘이 D-day 34일인 건 알고 있니?"

"엄마, 쉴 때는 걍 쉬는겨...ㅋㅋㅋㅋ"


엄마의 눈으로는 매일 매 순간 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다는 걸 어쩌겠어요.


"앵글아, 한국 엄마들의 불치병이 뭔 줄 알아?"

"뭔데?"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하는 거래. 아이가 맥없이 웃고 있으면 뭔가를 막 시켜야 할 것 같아진다나? ㅎㅎㅎㅎㅎ"

"뭐?? ㅎㅎㅎ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엄마도 불안해?"

"별로... 재밌어 보여...ㅎㅎㅎㅎ"



어느새 절반 이상 색이 채워졌습니다. 오늘로 31일 목전에 선 수능이지만 하교 후 앵글이는 색칠하기를 계속할 겁니다. 끝내야 속이 시원할 테니까요...


보글보글 10월 3주 "한때"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어른들이

"다 한때야.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 거야."

라고 하셨던 기억이 엄마에게도 있어. 그때 생각했었지. '한때긴 무슨, 힘들어 죽겠구만...'

그런데 앵글아,
힘들수록 더 많이 기억에 남는 건 맞는 것 같아.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어쩌면 아마도 엄마는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아. 그때로 돌아가도 딱 그만큼 공부했을 거고, 아마도 서울대는 못 갔을 거야. ㅎㅎ 여전히 야간 자율 학습하면서 소설책을 읽었을 것 같고, 독서실에서 친구들과 총무 몰래 나와 추위에 덜덜 떨며 옥상에서 사발면을 먹고 있을 거거든. 그래도 그랬던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그저 힘든 시간만 보냈던 건 아니었나 봐.

네 친구들이 학원을 오가며 모의시험을 볼 때, 너는 홀로 방에서 네 자신과의 씨름을 하고 있잖니?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널 응원해.

3학년을 맞이하며 수시를 포기할 때 했던 말 생각나니?

"엄마, 지난 2년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 학교의 각종 대회, 학생회, 내신관리까지 최선을 다했어. 조금 아까워서 울긴 했지만 실컷 울고 나니 이제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아. 다 버리고 정시 준비할게."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마도 아까웠어. 9월 수시 원서 낼 때 '한 곳만 내 보자'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키기도 했단다. 하지만 '네 선택'이고, '네 인생'이기 때문에 꾹 참았어. 엄마는 네가 선택한 네 인생을 응원할 거야. 혹 결과가 원하는 만큼이 아니어도 괜찮아. 인생은 아주 길단다. 올 한 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해도 앞으로의 네 시간은 충분히 많기 때문이지. 인생 100년으로 생각하면 그깟 1년, 있어도 없어도 그리 티 안나는 시간이야.

그러니까 앵글아,
힘들지만 행복감을 갖고 30일을 보내보자. 힘들면 쉬어도 괜찮아. 그리고 쉬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하렴. 엄마는 너와 함께 신나게 놀아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단다. 사랑한다... 나의 딸...

[한 달 앞으로 다가 온 그날을 함께 기다리며... 엄마가...]


수능을 앞둔 아이들의 시계가 똑딱입니다. 이제 제법 빠르고 대차게 울려대겠죠. 아이들의 표정에 긴장이 스쳐 지나갑니다. 세상 태어나 제 힘으로 열어낼 첫 번째 관문이 두렵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밀고 끌고 하기보다 기다림을 선택했습니다. 말없이 기다려도 아이는 알고 있어요. 엄마 입이 아주 많이 근질대고 있다는 걸 말이에요. 티 내지 않는다고 모를 리가 없어요. 말하지 않을 뿐 불안은 전염성이 있어서 어느덧 나도 모르게 아이의 마음에 닿을 것이기 때문이죠.


'지나고 나면 한때'인 것은 맞지만 조금 느슨하게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공부! 잘하면 참 뿌듯한 일이지만 행불행을 잴 수 있는 잣대는 분명 아니니까 말이에요.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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